화학업계 드리우는 트럼프 먹구름…기업은 '혼란'·정부는 '뜬구름'
입력 2017.02.07 07:00|수정 2017.02.09 14:37
    美 트럼프 정부 보호무역 정책 가시화
    수급상황에 이어 대외변수까지…복잡해진 화학업 전망
    대기업 '각자도생'·"극한 환경용 소재 개발" 제시하는 정부
    • 지난해 ‘역대 최고 실적’을 경신한 석유·화학사들에 트럼프 정부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제품의 수급 상황 이외에, 미·중 간 무역 분쟁 등 대외 변수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산업에 대한 기대치도 혼란에 빠졌다.

      LG·SK·롯데·한화 등 대기업 계열 ‘빅 4’  화학사들은 연구개발(R&D)·인수합병(M&A)·조인트벤처(JV) 등에 집중하고 있지만 이외 업체들은 마땅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산업 정책을 총괄해야 할 정부는 화학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안을 반복해 발표하고 있지만 "실효성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美 트럼프 '보호무역' 가속화에 석유·화학사 혼란…전문가들 "미-중 무역분쟁이 가장 큰 위협"

      지난 1월 27일, 미국 상무부가 한국에서 수입된 가소제(DOTP)에 대한 예비관세를 부과하기로 한 발표에 LG화학·한화케미칼·대한유화·애경유화 등 국내 화학사들의 주가는 각각 3~7% 하락했다. 각 화학사들은 미국으로의 가소제 수출 물량은 아직 60억원 미만의 미미한 양으로, 사실상 타격이 없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주가도 익일 회복세를 보였다. 하지만 시장에선 이를 트럼프 정부의 보호무역으로 인한 '신호탄'으로 받아들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각 대기업내 부설 연구소 등 전문가들도 트럼프 정부 출범이 국내 화학업계에 미칠 위험에 대한 분석을 진행하고 있다. 이들은 향후 보호무역주의 강화로 인한 '미-중 무역분쟁'을 국내 화학업체의 최대 위험 요소로 꼽고 있다. 주로 기초 소재·반제품을 중국에 수출하는 국내 석유화학업체들 입장에선, 중국의 미국 완제품 수출이 저하될 경우 연쇄타격을 입을 것이란 우려다. 국내 석유화학기업의 대(對) 중국 수출 비중은 45.4% 수준으로 여전히 가장 높다.

      임지수 LG경제연구원 연구원은 "미중간 무역 마찰 가능성이 커지는 등, 수출비중이 높고 국내 생산설비 의존도가 높은 한국 석유화학산업에 트럼프 정책은 리스크 요인이 크다"라며 "이외에도 올해부터 2019년까지 미국내 설비가 점차 완공될 예정이고, 트럼프 정부가 화학·에너지사에 대한 전격적인 규제 완화를 발표한 만큼 투자 환경이 좋아져 과열 경쟁 가능성이 커진 점도 우려된다"고 설명했다.

    • ◆각자도생 대기업, 수요 증가에 기대는 중견업체들…정부 정책은 '뜬 구름'만 반복

      국내 석유·화학사들의 대응도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LG화학은 범용 제품의 고부가 제품으로의 전환 투자 및 R&D 투자 계획을 속속들이 발표하고 있다. SK종합화학·롯데종합화학·한화케미칼도 호황시기에 확보한 자금을 바탕으로 M&A 및 해외 업체와의 JV 체결 등 향후 전략을 고려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국내 설비를 통한 범용 제품 생산에 집중된 중견·중소 규모 업체들의 대응 방안에 한계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앞으로의 수요 증가를 기대해 설비 투자를 결정하고 있지만, 대외 변수가 복잡해진 점이 '유탄'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한 증권사 화학담당 연구원은 "대기업 뿐 아니라 중견화학사들도 올해 영업이익률이 30%를 넘는 등 한 번도 경험 못 해본 돈을 벌다보니 의도치 않게 지금 호황이 '정상적'이라는 판단이 만연해진 것 같다"라며 "2018년이면 미국 설비가 가동된다며 몸집을 줄여온 회사들도 지금은 자신감이 붙었는지 공격적으로 증설에 나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늘어난 변수 속에서 전체 산업 정책을 주관해야 할 정부의 역할은 사실상 ‘탁상행정’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해 10월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을 발표한데 이어, 올 1월에도 화학 산업 전반에 걸친 구조조정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경쟁력 강화 방안은 석유화학협회가 컨설팅펌 베인앤컴퍼니에 의뢰해 작성한 컨설팅을 바탕으로 작성됐다.

      당시 구조조정 방안에는 ▲테레프탈산(TPA) ▲폴레스티렌(PS) ▲합성고무 ▲폴리염화비닐(PVC)을 공급과잉 품목으로 지정해, 추가 증설 대신 고부가 제품으로의 전환을 유도한다는 방안이 포함돼있다.

      업계 관계자는 “화학업계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 보면 ‘대기업 석유화학사 어느 곳에도 타격이 없고, 정부는 생색낼 수 있는 네 가지 소재를 절묘하게 선정했다’는 생각이 든다”라며 “이미 두 가지 소재(TPA·PS)는 대기업들이 고부가제품 전환 투자를 하고 있어 '정부 정책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었고, 나머지 두 가지(합성고무·PVC) 제품이 공급 과잉이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정부의 구조조정안이 나올 때마다 업계에서는 당장 수익이 발생하는 사업을 줄이고, 수요처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고부가 제품에 투자하라는 방침이 '선제적 대응’인지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반복되고 있다. 특히 ▲전기차·항공기·드론에 사용되는 경량소재 ▲고온·고압·극저온 등 극한환경용 특수소재 개발을 대안으로 제시한 컨설팅안에 대해 "업계 상황을 너무 모르는 소리"라는 불만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다른 화학업계 전문가는 “고정비 부담이 큰 조선업은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이 효과를 볼 수 있지만, 국내 화학사들의 설비는 지은지 오래 돼 대부분 감가상각이 끝나 고정비 부담이 크지 않다”라며 “PTA만 해도 고정비 부담이 적기 때문에 시황이 안 좋을 때 가동률을 60%까지 낮췄다가 최근에 가동률을 높이면서 충분히 자율적으로 이익을 내왔던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한 중견 화학업체 관계자는 "구조조정 방안을 지켜보면 석유화학협회 회원사로 영향력이 큰 대기업 계열 화학사들의 영향력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라며 "결국 의뢰인이 가장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는 컨설팅안이 나오는 구조"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