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EU 부동산 붕괴 조짐에 기관투자가들 초긴장 모드…이미 '가치 제로' 평가도
입력 23.06.05 07:00
취재노트
  • 불과 수년 전만 해도 국내 투자은행(IB)과 기관투자자들은 해외 부동산 투자에 열을 올렸다. 국내 기관들이 미국과 유럽 부동산 시장 '큰 손'이 됐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관련 투자가 봇물처럼 쏟아졌다. 한 건만 성공하면 국내 대체투자 수익률을 능가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해외 투자건에 대한 관리가 부족했다. 이 기간 투자대상 관리나 회수절차가 몇년 동안이나 막혔는데, 이제 엔데믹이 되자 미국과 유럽 등 핵심 지역의 부동산 자산 가치 하락을 겪는 상황이 됐다.

    일단 재택근무 확산과 경기침체 우려로 상업용 건물의 공실이 높아진 점이 원인으로 풀이된다. 높아진 공실률은 자연스레 부동산 가격으로 이어졌다. 무디스(Moody’s)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미국의 상업용 부동산 가격의 하락폭은 전분기 대비 0.76%를 기록했다. 미국 상업용 부동산 가격이 떨어진 것은 12년 만에 처음이다.

    미국 부동산 개발업체 포스트 브라더스(Post Brothers)는 2019년 가을 약 9250만달러(약 1250억원)로 평가 받던 워싱턴의 한 건물을 최근 우리돈 약 900억원에 못미치는 금액으로 인수했다. 또 세계 최대 사모펀드(PEF) 운용사 블랙스톤은 2014년 1억2900만달러(약 1700억원)에 매입한 오피스빌딩을 약 3분의 2 수준에도 못미치는 8600만달러(약 1082억원)에 매각했는데 운용 중인 상품에 대규모 환매 요청이 들어온 것이 원인으로 파악된다. 

    미국 부동산 투자회사인 클라리온 파트너스(Clarion Partners)는 현재  샌프란시스코의 한 업무용 고층 빌딩을 약 10년 전 매입가의 절반 정도에 내놨지만 매각 여부가 아직도 미지수다.

    이처럼 부동산 가격이 본격적으로 하락하기 시작하자 매각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국내 한 증권사와 대체투자운용사가 리츠를 통해 매입한 워싱턴소재 오피스빌딩(인센티넬2스퀘어)은 원매자를 찾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미국 맨해튼에 위치한 1551브로웨이프로퍼티, 더 센트럴, 이베이오피스(새너제이) 등 국내 기관투자자들이 출자한 오피스 빌딩 또한 대규모 손실이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국내 한 사모펀드(PEF) 운용사 대표급 관계자는 "최근 일부 NPL·부동산 전문 투자 운용사는 투자한 미국 오피스 빌딩에 대해 출자금 전액 손실을 기록했다"며 "해당 운용사뿐 아니라 동일한 대상에 투자한 국내 주요 기관투자가들 모두 손실 구간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해외 부동산 자산 가격이 손 쓸 겨를이 없이 빠지기 시작하자 국내 기관들은 현재 초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시가가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주식과 채권 등 전통적인 투자 자산과 달리, 부동산·인프라와 같은 대체투자 자산은 실제로 회수에 나설 때까지 그 가치를 산정하기 어렵다. 즉 실제 자산 가격은 빠지기 시작했는데 장부가는 여전히 그대로인 상황. 직접 중순위 또는 후순위 투자에 나선 투자금의 손실이 얼마만큼 불어날지 예단하기 어렵단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국내 주요 공제회 한 최고투자책임자(CIO)는 "국내 기관투자가들이 투자한 자산들이 중순위 또는 후순위에 집중돼 있는데 실제로 자산가치 하락을 장부에 반영한 사례는 극히 드물 것"이라며 "사실 우리 기관 또한 투자한 해외 (상업용) 부동산 몇 건에 대해선 사실상 회수가 불가능할 것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아직 손실 처리는 하지 않은 상태다"고 밝혔다.

    이 같은 상황이 다른 기관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파악되지만 실제로 대규모 손실을 기록한 사례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일부는 만기를 연장했거나, 만기 연장을 검토하면서 손실을 확정하지 않은 채 '이연'하는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투자은행(IB) 업계 한 관계자는 "대부분의 기관투자자들이 해외 대체 부동산 투자 대상에 대해 손실을 기록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아직까진 손실을 확정하지 않으면서 해외 부동산발 위기가 수면 위로 등장하지 않은 상황이다"고 말했다.

    이러다보니 국내 대형 운용사의 해외 부동산 투자건에 대해 기관투자가들이 소송을 검토하는 사례도 등장했다. 부동산 가격의 하락에 기관투자가들이 투자건을 세부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발생한 사례인데, 이제껏 국내 기관투자가의 허술한 실사 및 세밀하지 못한 보고서 검토 등 해외 부동산 투자 행태에 허점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계기가 될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이와 관련해 IB 업계 한 관계자는 "부동산 가격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손실 구간에 진입하자 투자자들이 해당 투자건을 면밀히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드러난 사례"라며 "운용사에서 투자자를 모집하며 설명한 구조와는 달리, SPC를 통해 우회적으로 투자하는 방식으로 설계하면서 기관투자가들이 막대한 손실이 예상되자 해당 운용사 및 운용역에 대해 소송을 검토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문제는 앞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더 큰 부동산 가격의 하락이 찾아올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 부동산 가격의 하락으로 인해 현지 은행들이 대출 회수에 나서게 될 가능성, 현재의 금리 수준이 장기간 유지하거나 또는 상승하게 되면 이를 감당하지 못해 부동산의 매각이 쏟아질 가능성 등이 모두 열려있다. 물론 해외 투자에 참여한 국내 은행이 동참할 수도 있고, 국내 중순위-후순위 투자자들이 펀드에 추가 출자하기 위해 기존 자산을 매각하는 움직임을 나타낼 가능성도 있다.

    현재 금융당국이 파악하고 있는 국내 기관투자자, 금융기관들의 해외부동산 투자 규모는 약 78조원이다. 이 가운데 30조원 가량의 만기가 향후 3년 내 도래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과 유럽의 부동산 경기가 다시 살아날 시기를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만기 연장이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투자자들의 대규모 환매 요청이 들어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같은 상황임에도 불구, 오히려 일부 기관들은 "해외 부동산 투자의 적기가 찾아오고 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지금까지의 손실을 차치하고, 부동산 가격의 하락이 가팔라지는 시점에 투자에 나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높은 수익률을 노리겠단 전략이다.

    시선은 다시 감독당국으로 모인다.

    우선 금융당국에서 아직 장부에 반영하지 못한 현재까지의 손실 규모를 면밀히 파악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또한 과거 기관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졌던 '묻지마' 해외 부동산 투자 행태에 대한 허점을 파악하는 일, 그리고 안전장치를 세밀히 설계하기 위해 실사 과정을 강화하는 등 개별 운용사와 기관투자가들의 자구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단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