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은 비은행, 통신사들은 비통신, 유통은 제조업
“본업-비본업 구분 패러다임 사라져…정치적 도구로는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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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공백으로 그 어느 때보다 뒤숭숭한 연초지만, 기업들은 새해 계획을 발표하며 제 살 길을 찾아가고 있다. 기업들의 발표를 살펴보면 공통점이 보인다. 글로벌 경쟁의 심화와 국내 저성장 기조 고착화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하나같이 비(非)본업 강화에 힘을 싣는 모양새다.
국내 통신사들은 주력사업인 통신업 외에 다양한 플랫폼 사업을 추진 중이다.
황창규 KT 회장은 신년 전략워크숍에서 미디어, 스마트에너지, 기업·공공가치 향상, 금융거래, 재난·안전 등 ‘5대 플랫폼’을 미래 핵심사업으로 성장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현재 통신 분야의 매출 비중이 대부분인 KT를 2020년에는 플랫폼, 글로벌 등 비통신 분야의 매출 비중이 20~30%에 달하는 플랫폼 사업자로 변신시키겠다는 것이다.
박정호 SK텔레콤 사장은 새해 들어 "인공지능, 사물인터넷(IoT), 5세대(G) 통신 등 미래 ICT 산업 생태계 구축에 향후 3년간 11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AI, 자율주행, IoT 등을 '뉴 ICT 생태계'의 핵심으로 보고 집중투자하기로 했다. '플랫폼사업부문'도 신설해 플랫폼 서비스의 '기획-개발-기술-인프라'에 필요한 모든 기술과 서비스를 지원한다
LG유플러스는 올해 홈IoT 분야에서 차별화된 서비스 제공을 통해 국내 1위 자리를 공고히 하는 한편 공공사업(Utility), 산업IoT, 스마트시티(SmartCity) 등 B2B 분야의 시장을 선점한다는 전략이다.
유통업체들도 불황이 깊어질 것에 대비하기 위해 그동안의 사업을 정비하면서 기업 인수합병(M&A)으로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유통 공룡' 롯데는 적극적인 M&A로 체질개선화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12월 현대로지스틱스 인수를 마무리하고 '롯데글로벌로지스'로 바꿨다. 롯데의 물류사 인수는 CJ대한통운의 성공 등으로 택배시장이 차세대 먹거리로 떠오르는 데 따른 것이라는 평가다. 렌터카 업계 1위이기도 한 롯데는 물류나 카서비스 사업의 가능성도 높게 보고 있다. 롯데렌터카의 카셰어링 브랜드 그린카도 확장하고 있다. 그밖에 병원, 호텔 인수에도 나섰다.
CJ도 손경식 회장이 M&A 추진을 신년계획의 키워드로 삼았다. 앞으로도 식품, 물류, 렌탈 등 차세대 먹거리를 위해 여러 M&A에 적극적으로 나설 계획이다. 특히 CJ대한통운을 통한 해외 물류회사 인수가 주목된다.
현대백화점은 동부익스프레스, 동양매직 인수전에 뛰어들며 M&A 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현대백화점은 한섬에 이어 SK네트웍스의 패션부문을 양도받는 등 패션 부문을 더 확대했다. 현대백화점은 기존 그룹 사업의 시너지가 나는 부분은 언제든 M&A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신세계는 주로 식음 분야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신세계푸드를 통해 스무디킹을 인수하거나 이마트를 통해 제주소주를 인수하며 관련 사업에 진출하는 등 사업 다각화를 꾀하고 있다. 그룹 내 식음료사업부를 신세계푸드로 집중시킨 데다 식품제조업을 강화하기 위해 R&D 센터를 여는 등 확장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비본업 강화는 금융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 주요 금융그룹들은 올해 키워드도 '비은행 강화'를 꼽았다. 은행 수익성이 개선되기 쉽지 않다보니 비은행 강화가 불가피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KB금융그룹의 외형 성장에는 비은행 강화가 있었다. LIG손해보험에 이어 현대증권까지 인수하며 그룹의 자산 규모와 비은행 계열사 수수료 수익이 크게 늘었다. KB금융은 올해에도 비은행 계열사의 자산 및 수익 성장에 집중할 계획이다.
민영화에 성공한 우리은행 역시 지주사 재전환에 착수하며 비은행 강화의 기치를 올렸다. 이광구 행장이 캐피탈, 부동산관리회사 등 사업 다각화를 위한 M&A를 거론한 상황이다. 계열사인 우리종합금융의 증권 라이선스 전환 가능성도 꾸준히 제기된다.
기업들의 비본업 강화는 이제 일상화할 전망이다. 기업들이 생존을 위해 활로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본업과 비본업을 구분하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기업의 본업이 바뀔 수도 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시장 변화에 맞춰 본업을 바꾼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 기업들처럼 주변에 경쟁자들이 늘어나고 내수 시장에서 획기적 턴어라운드를 기대하기 어려운 국내 기업들도 같은 처지에 놓이고 있다”며 “특히 정치권의 가이드라인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점에서 기업 스스로가 비본업이 본업으로, 본업이 비본업으로 바뀔 수 있다는 있다는 융통성이 필요해진 시점”이라고 전했다.
비본업 강화라는 구호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대한 지적도 있다. 특히 포스코, KT 등 민영화한 공기업에서 확인할 수 있다.
권오준 회장 2기에 돌입한 포스코는 지난해 실적 발표에서 리튬·니켈 등 에너지 신소재 사업을 그룹의 미래 먹거리로 육성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권오준 회장이 비철강 신사업을 담당하는 공식 시스템이 만들어진 만큼 신사업에 대한 그룹의 집중도는 더 커질 전망이다.
하지만 첫 취임 당시만 해도 철강 본업 강화를 주창했던 권오준 회장이다. 포스코특수강 매각은 권 회장 취임 후 첫 작품이었다. 회사 측은 세아그룹과 ‘윈윈’이 된 결과였다고 주장하지만, 관련업계에선 특수강 시장 성장 가능성을 감안하면 알짜배기 회사를 판 셈이라고 지적한다.
재계 관계자는 “전임자인 정준양 전 회장의 색깔을 지우기 위한 조치였지만, 몇 년 만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라며 “정권 교체와 함께 이뤄지는 회장 교체 때마다 매번 일어나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황창규 회장도 취임 초기만 해도 통신사업 강화에 방점을 찍으며 KT렌탈·KT캐피탈 등 비통신 계열사의 매각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방향성에선 차이가 나지만 2기에 접어들자 황 회장 역시 ‘비통신’ 강화에 힘을 싣고 있다.
투자은행(IB) 관계자는 “이석채 전 회장이 무리한 확장을 한 측면도 있지만, 현 상황에서 보면 버리기 아까운 사업들도 있다”며 “포스코, KT 모두 수장 자리를 놓고 사내 정치가 치열하게 전개되다 보니 기업 전략은 정신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매번 바뀌고 기업 영속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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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7년 02월 12일 09: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