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금 무섭고 미국 시장은 필요하고…규제 기준 충복 부담
정세 불안·트럼프 정부·북한 이슈까지…국내 은행 대응 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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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자금세탁방지(ALM, Anti-Money Laundering) 규제 강화에 따라 국내 시중은행들의 대응 필요성이 거론되고 있다. 미국의 강력한 금융 규제가 새로운 일은 아니나 감시의 눈길이 유럽에 이어 아시아권으로 점차 옮겨오는 데 부담을 느끼는 상황이다.
자국우선주의를 주창하는 트럼프 정부와 복잡해지는 세계 정세와 반테러 정서의 강화 등을 감안하면 미국의 규제는 더 강해질 것으로 보인다. 대규모 벌금을 내기는 부담되고 미국 시장과 접점도 유지해야 하는 시중은행들로서는 미국 규제 기준 준수 방안 마련에 나서고 있다.
관련업계에 따르면 신한은행은 최근 미국 법인의 자금세탁방지 컴플라이언스(준법감시) 시스템 강화를 위한 내부 검토에 들어갔다. 미국 현지에서 준법감시 인력을 충원했고, 자금세탁방지 시스템 개선을 위해 관련업체를 물색하고 있다. 외부 기관에도 자문을 의뢰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금융당국이 자금세탁방지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함에 따라 대응에 나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미국 증시에 상장돼 있는 우리은행의 경우 최고자율준수관리자(CCO, Chief Compliance Officer)를 파견, 현지 사업장 전반의 자금세탁방지 시스템을 통할하도록 하고 있다. 컨설팅을 받아 관련 매뉴얼을 정비하고 시스템 강화도 꾀하고 있다.
하나은행은 2014년부터 선제적 대응을 해왔기 때문에 당장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면서도 자금세탁방지 모니터링 시스템은 갱신하고 있다. 국민은행 역시 직접적인 개선 부담은 크지 않지만 다른 은행의 대응을 살피며 미국 당국이 요구하는 기준을 유지해 나가겠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지난 2010년대 들어 유럽계 은행의 자금세탁에 대대적인 제재를 단행한 바 있다. 미국의 제재 대상 국가와 거래했다는 이유로 적게는 수천억원, 많게는 10조원에 달하는 벌금이 부과됐다.
프랑스 BNP파리바은행은 2014년 아프리카 수단 등과 거래한 혐의로 무려 89억7000만달러, 한화 약 10조원에 달하는 벌금을 내야 했다. 이 외에도 영국 바클레이스(약 3억달러), 스탠다드차타드(약 7억달러), HSBC(19억달러), 네덜란드 ING(약 6억달러), ABN암로(5억달러) 등이 제재대상에 올랐다.
최근엔 아시아권 은행에 대한 감시 수위를 높여가는 모습이다. 지난해 중국 4대 은행 중 하나인 농업은행과 대만 메가뱅크에 자금세탁방지법 위반으로 각각 2억1500만달러, 1억8000만달러의 벌금이 부과됐다.
우리나라에선 지난해 IBK기업은행과 올해 초 NH농협은행이 미국 금융당국과 가벼운 수준의 제재인 이행약정(Written agreement)을 맺기도 했다. 이에 앞서 우리은행과 IBK기업은행이 이란과의 자금세탁 혐의에 연루된 바 있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미국 금융당국이 우리나라 은행의 포괄적 이란제재법 위반 여부를 검사하는 과정에서 자금세탁방지 체계가 허술하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며 “통상적으로 해온 자금세탁방지 검사를 넘어 특히 우리나라 은행에 대한 전수조사에 들어갈 것이란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은행들은 미국에 법인이나 지점, 사무소 등 다양한 형태로 진출해 있으나 아직 현지 금융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유럽계 은행들과 달리 세계 각지와의 자금 거래 빈도가 낮아 여러 갈래의 자금이 섞여들 여지도 크지 않다. 자금세탁 규제 위반이 발생해도 ‘고의’ 보다는 ‘무지’에 의한 경우가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로 인해 타격이 유럽처럼 크지는 않을 것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국제 및 미국 정세 변화에 따른 미국 금융당국의 기류 변화 가능성도 있어 안심하긴 이르다는 의견도 있다. 아직 제재와 무관한 은행들도 다른 은행의 준법감시 부서와 정보를 나누며 미국 시장 분위기를 살피는 모습이다.
자금세탁방지법은 아프리카와 중동 등 지역 거래 과정에서 테러집단으로 자금이 유입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취지도 있는 만큼 앞으로도 규제가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과거엔 은행이 이러한 거래에 직접 연루되는 사례만 문제가 됐다. 그러나 최근엔 이런 상황을 미리 방지할 인적·물적 기반을 닦아두지 않은 경우에도 제재가 이뤄지는 추세다. 개인정보보호가 강한 국내법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송금자 개인정보도 요구하는 등 깐깐한 요구가 많아지고 있다.
미국은 ‘강력한 미국 재건’을 꾀하는 트럼프 정부의 정책이 본격적으로 가동 중이다.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 폭격으로 테러와의 전쟁 의지를 명확히 했다. 제재국가와 거래하는 제3국의 기업과 금융회사, 정부에도 제재를 가하는 ‘세컨더리 보이콧’ 카드도 만지작거리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북한 변수도 있다. 미국은 북한의 테러지원국 재지정과 세컨더리 보이콧 실행을 검토 중이다. 배후의 실체를 확인하기 어렵고 지리적으로도 가깝다 보니 북한과 연루된 자금세탁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배경 탓인지 미국의 검사도 최근 들어 더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 은행들의 반응이다.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미국 시장의 낮은 수익성이나 규모의 경제를 충족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 금융당국이 요구하는 수준의 컴플라이언스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면서도 “해외 주요 거래가 달러로 결제된다는 점과 대규모 벌금 가능성을 고려할 때 인적·물적 시스템 강화는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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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7년 04월 26일 16:05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