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계열사 경쟁 체제 돌입…재무라인 지고, 전략라인 부상
IB업계 "일감 늘었지만 영향력 줄어" 기대·우려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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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수·합병(M&A)시장에서 SK그룹은 가장 귀한 손님이다. 주력 사업의 호황으로 두둑한 실탄도 갖춘 상태에서 주요 거래(Deal)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단골이다. 연초부터 그룹을 M&A에 특화된 조직으로 탈바꿈했고, 그간 수차례 인수 실패도 경험으로 축적됐다.
SK그룹은 투자은행(IB) 등 자문사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원하는 방향으로 거래를 이끌어가고 있다. IB 업계엔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고 있다. 향후 먹거리 확대 측면에서 큰 손의 '귀환'은 긍정적이지만, 점차 자문사 의존을 줄여가는 SK의 변화에 초조한 분위기도 감지된다.
올해 SK그룹은 일찌감치 대규모 인사를 마무리지었다. 키워드는 'M&A'와 '경쟁'으로 압축된다. 최태원 회장 부재 당시 유명무실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수펙스(SUPEX) 기능을 다시 강화했다. 지난해까지 공동 사장으로 SK㈜를 이끌던 조대식 사장을 수펙스 의장으로 부임시켜 그룹 M&A 총괄을 맡겼다. 함께 지주사에 있던 박정호 사장은 SK텔레콤으로 이동해 도시바 인수·SK하이닉스의 자회사화 등 그룹 현안을 맡게 됐다. 이외에도 주요 계열사 수장에게 성과에 따른 ‘스톡옵션’도 부여해 본격적인 경쟁 구도를 마련했다.
그룹에 정통한 관계자는 “SK㈜ 공동 사장 시절부터 누가 지주사 가치 상승에 더 기여하는지를 두고 암묵적인 경쟁이 이뤄졌다”라며 “조 사장이 SK머티리얼즈의 인수 등을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그룹 2인자로 발돋움한 점이 다른 사장들에게도 시사점을 줬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최태원 회장이 '딥 체인지(Deep Change)'를 내세워 전 계열사의 변화를 강조한 점에서도 핵심은 M&A다. 그룹 내 관계자는 “통신·정유 등 내수기반의 안정적 사업에서 수익을 얻는 그룹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게 SK의 지상과제였다"라며 "절박하게 살아남아 결국 이익을 창출하고 있는 SK하이닉스 M&A 스토리에 최 회장이 고무된 분위기"라고 말했다.
주요 계열사내 부사장·임원급 인사 등 실무진에서도 M&A를 담당하는 전략라인의 부상이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SK그룹에서는 주로 관리를 맡는 재무 라인의 힘이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정적 현금창출 위주의 사업 구조가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올해 인사부터 계열사별로 신사업을 발굴하고 거래를 진행하는 전략 라인에 힘을 싣기 시작했다는 평가다.
계열사 내 M&A를 총괄하는 부서의 역량도 강화되고 있다. SK㈜ 내 PM(Portfolio Management)실도 올 초부터 IB, 법무법인의 M&A 인력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자문사 도움 없이 해외에서 약 4건의 매물을 자체 발굴해 인수를 검토하고 있다.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거나 계열사간 협업이 필요한 거래는 수펙스가 주관하지만, 일정 규모 이하 M&A는 계열사 권한을 독립적으로 보장하는 분위기다. IB업계 관계자는 “현재 그룹 내 계열사들이 M&A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주인 없는 회사’가 떠오를 정도로 전방위로 매물을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SK의 변화를 가장 절실히 체감하는 곳은 거래에 참여하는 IB업계다. 광폭 행보에도 마냥 웃을 수 없다는 평가도 나온다. M&A 주도권이 이미 IB에서 대기업으로 넘어갔다는 평가는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지만, 발빠른 SK의 자체 역량 강화에 설 자리는 점점 줄고 있다는 위기감이 만만치 않다.
한 대형 법무법인 파트너 변호사는 "지금까지는 수수료(fee)도 많이 챙겨주고 거래 건수도 많은 고마운 고객이지만, 점차 M&A딜에서 핵심 업무는 안 맡기는 등 자문사 의존도를 줄여가는 분위기를 체감하고 있어 긴장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보안이나 실무 측면에서 국내 자문사에 대한 수요가 이전같지 않은 건 사실"이라며 "현업 실무진과 연계해 내부 M&A 팀에서 매물을 찾거나 필요할 경우 현지 자문사를 활용하는 사안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체 M&A 역량을 끌어올린 점도 두드러진다. 최근 SK㈜의 실트론 잔여지분 인수가 대표적이다. 반도체 호황을 맞아 기업 가치를 3배 가까이 키우겠다는 내부 청사진까지 마련해놓았지만, 회수가 절실한 두 채권단을 저울질해 별다른 출혈없이 잔여지분 인수를 마무리했다. SK해운 재무적투자자(FI) 교체에서도 후보였던 양 사모펀드(PEF) 운용사를 경쟁시켜 유리한 조건을 끌어낸 후, 최종적으론 선택지에 없던 총수익스와프(TRS)를 선택해 거래를 끝냈다.
IB 업계 관계자는 “M&A를 진행할 때 해당 계열사뿐 아니라 다른 계열사의 동일 직급 임원들도 자료 요청을 해올 정도로 자문사를 괴롭혀오며 스터디를 해왔다”라며 “자문사에 일을 맡기면서 미안해하는 LG는 물론, 전권을 부여하는 롯데·CJ와 달리 꾸준히 거래에 개입해 역량을 흡수해왔다”고 설명했다.
재계 관계자는 "수년 전만 해도 SK그룹이 손대는 거래마다 족족 실패한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시장에서 가장 돋보이는 플레이어가 됐다"라며 "결국 M&A는 규모와 관계없이 실패를 겪어가며 사례를 쌓아가는 게 중요한 자산이라는 점을 증명했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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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7년 05월 15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