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업 전반 내재화 추진도 원인
기술 격차있는 기업은 우대 '두 얼굴'
'꽌시' 기댄 對中 전략 전면 수정해야
동남아 시장이 대안 될지는 미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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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우리나라와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국교가 맺어지면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진, 금기의 땅이었던 중국은 국내 기업들에 기회의 땅으로 찾아왔다. 값싼 노동력은 생산 비용의 획기적인 절감을 가져왔고, 10억명이 넘는 인구는 잠재적인 소비자였다. 굴지의 대기업을 중심으로 하나둘 중국으로 건너갔고, 그 뒤를 수많은 협력업체와 중소기업들이 따라갔다.
중국도 이를 환영했다. 뒤떨어진 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글로벌 수준으로 성장한 국내 기업들의 노하우를 참고할 만했다. 체제는 달랐지만, 지리적 이점과 같은 동아시아권 문화라는 점도 문호 개방에서 이질감을 줄여줬다.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과 2015년 한중 자유무역협정(FTA)발효로 양국은 경제적으로는 더 이상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된 듯 보였다.
그러나 그 관계는 사상누각이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를 두고 우리나라와 중국의 갈등이 첨예화한 이후 중국은 비공식적으로, 하지만 노골적으로 국내 기업들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국내 대기업들은 정부 차원의 압박에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중국 사업 철수를 선언하는 기업들이 나오면서 이른바 ‘차이나 엑소더스(탈출)’ 현실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사드가 직접적인 갈등 원인은 아니라고 분석한다. 미국과 함께 G2로 올라 선 중국은 '중화제일주의' 기치 아래 산업 전반의 내재화를 추진하고 있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외국 기업들의 효용성은 다했고, 기술 격차가 있다 하더라도 중국 기업들이 따라잡는 것은 시간 문제다. 국내 기업 압박에 있어 사드는 좋은 불쏘시개 역할 정도다.
지난 25년간 중국이 어떻게 바뀌었고, 어떤 대응 전략을 세워야 하는지 정치권과 경제 주체들은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대(對)중국 전략을 원점에서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의 사드 보복 첫 대상이었던 롯데마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 시장에서 철수는 없다’는 입장을 피력해 왔다. 7000억원에 육박하는 직간접적인 자금 지원에도 제재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롯데그룹은 점포 매각 착수에 나서며 중국에서의 사업 철수 가능성을 열었다. 보복의 수위는 제조기업으로까지 확산됐다. 최근 현대자동차의 중국 1~4공장은 부품사 납품대금 지연으로 가동이 중단됐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 ‘글로벌타임스’는 “현대차의 중국 파트너인 베이징자동차가 합자회사 베이징현대와의 합자 관계를 끝내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현대차는 일축했지만, 이 여파가 동풍열달기아 등 중국 내 다른 현대차 법인과 현대모비스 등 부품사들에까지 미칠지 노심초사하고 있다.
기업들은 중국의 경제 압박 원인으로 사드를 지목하지만, 중국 정부가 산업 내재화를 추진한 이상 결과는 일찌감치 예견돼 있었다. 타격을 받은 산업과 기업 모두 중국이 역량을 키웠거나 스스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중국 산업에 정통한 애널리스트는 “한국에서도 미국 월마트, 프랑스 까르푸가 이마트에 밀리며 철수를 한 것처럼 유통업의 장벽은 매우 낮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국내 마트들의 성장 가능성은 꺾인 상황이었다”며 “자동차 시장 역시 중국 자동차들의 경쟁력이 올라가면서 상대적으로 비싼 현대차를 사야 할 소비자들의 니즈가 약해졌고 판매 부진은 사드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식품, 면세점, 화장품, 게임, 엔터테인먼트 등 중국 시장을 겨냥한 사업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신세계그룹은 일찌감치 중국 철수를 결정했다. 이마트는 1997년 중국에 진출한 뒤 27개 매장을 오픈했다. 중국 이마트의 4년간 누적 적자는 1500억원에 달한다. 특히 최근 3년 동안에는 영업적자가 이어졌다. 이마트는 철수 방침을 정하고 각 매장별 계약 기간에 따라 순차적으로 정리 작업을 진행해 왔다. 중국 철수에 따른 이마트의 투자손실 리스크는 6000억원 이상이 될 전망이다. 그럼에도 중국 철수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자동차 산업에서도 중국은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으로 떠올랐다. 반도체나 디스플레이에 비해 진입장벽이 낮아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중국 기업 육성이 이뤄지고 있다. LG화학과 삼성SDI는 지난해 6월 중국 정부의 4차 배터리 모범 규준 인증에서 탈락했다. 중국 공신부는 올해 여덟 차례에 걸쳐 '신에너지 자동차 추천 목록'을 발표하면서 184개사 2538개 모델을 추가했지만 한국 기업 배터리를 장착한 차량은 단 한 대도 포함되지 않았다. LG화학과 삼성SDI는 하반기부터 중국 전기차용 배터리 판매가 중단되면서 난징과 시안에 위치한 현지 배터리 공장 가동률이 한 때 10% 이하로 떨어지기도 했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금호타이어 자구안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내년 3월 말까지 중국법인 지분매각을 통해 합작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중국과 베트남 공장을 지배하고 있는 홍콩법인을 ‘3개 중국 공장’과 ‘베트남 공장’으로 인적분할해 중국 공장 지분 70%를 매각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타이어 굴기를 내세운 중국 시장에서 경쟁이 만만치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 중국에서 글로벌 10개사의 매출 성장률은 한 자릿수인데 반해 중국 업체들은 30%가 넘는다. 앞으로 글로벌 가격 경쟁 리스크가 점차 부각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중국 가전시장에서 국내 기업 존재감은 사실상 사라졌다. 가전 쪽에선 하이센스·하이얼·TCL 등이, 스마트폰 부문에선 화웨이·오포·비보·샤오미가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다. 중국 제품은 가격이 싸고 성능 면에선 크게 불편함을 못 느끼는 수준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전방위적인 마케팅 대신 프리미엄 전략으로 버티고 있는 판국이다.
해외 컨설팅펌 관계자는 “중국 정부의 공격적인 육성정책과 민간 중심의 생태계 구성, 풍부한 내수시장과 다양한 투자 플랫폼으로 중화제일주의가 자리를 잡고 있고, 중국 소비자들 역시 이에 편승하고 있다”며 “자족이 가능해진 중국은 이제 웬만한 브랜드 경쟁력으로는 생존하기 쉽지 않은 시장이 됐다”고 진단했다.
중국 정부는 기술 격차가 있는 B2B(기업간거래) 부분에 대해선 여전히 우대를 해주는, 상당히 이중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반도체 사업을 하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상대적으로 타격이 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기술 격차가 줄어들면 언제라도 다른 산업처럼 압박을 받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부문에선 국내 업체와 중국 업체들의 격차가 있지만, 중국의 대대적인 지원 하에 조금씩 격차가 좁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SK하이닉스가 일본 도시바메모리 인수에 열을 올리는 이유도 도시바반도체가 중국에 넘어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절실함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리스크는 국내 기업들의 신용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사드 보복은 물론 중국 기업들과의 경쟁 심화로 국내 기업의 신용등급 추가 상향은 어렵고, 더 나아가 국가 신용등급에도 부정적이라고 진단했다. S&P는 최근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의 등급전망을 부정적으로 조정했다.
국내 금융사들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중국의 깐깐한 규제로 대규모 투자를 감행하지 못한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국내 금융사들의 중국 진출 역사 역시 한중 수교 직후인 1992년부터 시작됐지만, 유의미한 투자는 이뤄지지 못했다. 국내 거의 모든 은행이 현지에 진출해 100여개 점포를 세웠지만, 주로 현지에 진출한 국내 기업의 금융서비스 창구 역할에 그쳤다. 중국 역시 특별한 이유 없이 법인·지점 설립 허가를 내주지 않는 방식으로 국내 금융사의 현지 진출을 제한했다.
국내 금융권 전체의 중국 투자 규모가 롯데그룹 한 곳에 미치지 못할 거라는 말까지 회자될 정도다. 이미 수익성에 민감한 중소형 증권사부터 중국에서 떠나기 시작했다. 지난해 키움증권과 한화증권이 중국현지법인을 폐쇄했다. 최근 2년내 중국에 새로 진출한 국내 금융회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치권과 경제계가 중국의 변화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중국 기업의 경쟁력 강화 속도는 기대 이상으로 빨랐고, 중국 소비자들의 트렌드 민감도는 이제 글로벌 수준이다. 하지만 중국에 대한 인식과 이해도는 25년전과 크게 다를 바 없고, 여전히 현지 인맥 중심의 ‘꽌시(관계)’에만 기대고 있다. 중국의 힘을 인정하고 중국 시장 진출과 철수, 중국 기업과 경쟁 등 대(對)중국 전략을 '제로 베이스'에서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을 떠난 국내 기업들은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동남아 시장의 성장 가능성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 리스크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해외 IB 관계자는 "동남아는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에서 해상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중국의 경제와 대외정책에 매우 중요한 거점 지역"이라며 "중국 정부가 자기 앞마당을 한국 기업들이 차지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중국 정부는 동남아 국가에 대한 투자와 교역을 확대하고 있고 중국 자동차와 가전 브랜드가 동남아 시장 진출을 확대하고 있다. 동남아 시장은 국내 기업과 중국 기업 간의 새로운 결투장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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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7년 09월 18일 13: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