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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아이덴티티, 이른바 CI(Corporate Identity)는 회사의 얼굴이다.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를 내부에서 공유하고 이를 대외에 공표한다. 미래 경영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경영전략이기도 하다. 기업의 정체성 표현뿐 아니라 적극적인 마케팅 활동 및 경영환경을 개선하는데 꼭 필요한 작업이 됐다.
올 들어 유난히 국내 기업들의 CI 교체 바람이 거세다. 회사의 크기와 상관없이, 너나할것없이 얼굴 바꾸기가 한창이다. 그런데 뭔가 찜찜한 면이 없지 않다. CI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보면 핵심이 빠진 느낌이다. 기업의 가치, 정체성이라는 진정성 보다는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명목 하에 오너가(家)의 이슈 덮기에 더 큰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다.
롯데그룹은 창사 이후 다섯번째 CI를 선보였다. 이번 CI 교체는 롯데 경영혁신실에서 신동빈 회장의 주도로 추진됐으며, 새로운 CI 제작은 롯데 계열 광고대행사인 대홍기획에서 이뤄졌다. 신동빈 회장 지시로 CI가 교체된 것은 2012년 신 회장이 취임하면서 바꾼 이후 두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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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CI는 롯데의 영문표기 ‘LOTTE’의 알파벳 ‘L’에서 착안해 소문자 필기체로 간소화된 것이 특징이다.
해당 심볼은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아 롯데지주가 새롭게 제정한 비전인 ‘Lifetime Value Creator’의 약자인 L, V, C로도 읽힐 수 있는 형태로 디자인됐다. 고객의 전 생애에 걸쳐 최고의 가치를 제공하겠다는 롯데의 의지가 담겼다.
심볼의 둥근 마름모꼴은 롯데의 새로운 터전이 된 잠실 롯데월드타워·롯데월드몰의 부지를 조감(鳥瞰)했을 때의 모양을 본 뜬 것이다. 좌측 하단의 점은 고객의 ‘삶의 시작’을, 연속되는 선은 롯데와 더불어 풍요롭게 흐르는 ‘삶의 여정’을 표현했다.
부드러운 곡선의 형태는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여주인공인 ‘샤롯데’의 영원한 사랑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심볼의 전체적인 색감과 이미지는 따뜻하고 친근하면서도 굳건하며 안정적으로 디자인했다.”
CI 교체에 대한 홍보자료 내용이다. 회사 측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꿈보다 해몽”이라는 냉정한 인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횡령과 배임 등 오너가의 비리로 얼룩진 그룹 이미지가 CI 교체로 얼마나 개선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동부그룹은 'DB그룹'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 CI 홍보에 한창이다. 새 그룹명인 DB는 기존 '동부(DONGBU)'의 영문 이니셜을 조합한 것으로, '큰 꿈과 이상을 가지고 미래를 준비하겠다'는 뜻을 담은 '드림 빅(Dream Big)'을 의미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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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CI의 색상인 오렌지색과 녹색을 적용해 `동부`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면서 ‘동쪽’과 ‘젊음’을 의미하는 색상인 청색을 통해 미래를 향한 의지와 희망을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태양(오렌지)’과 ‘물(청)’이 만나 ‘생명(녹)’을 탄생시킨다는 의미도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도형 색상에 그라데이션 효과를 적용해 입체감과 역동성을 부여하였습니다.”
동부화재·동부생명·동부증권·동부저축은행·동부하이텍·동부메탈·동부라이텍·㈜동부 등 계열사들은 각각 DB손해보험·DB생명·DB금융투자·DB저축은행·DB하이텍·DB메탈·DB라이텍·DB Inc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룹명을 바꾼 것은 자의반 타의반이다. ‘동부’ 브랜드를 소유한 동부건설이 사모펀드 키스톤PE로 매각되면서 계열사들이 ‘동부’란 브랜드를 사용하기 위해선 브랜드 사용료를 지불해야 한다. 또 부실기업으로 낙인 찍힌 ‘동부’라는 이름 대신 새로운 사명으로 회사 정체성을 재정립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근영 DB그룹 회장은 기념사를 통해 "조국의 근대화와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쉼 없이 달려온 동부의 시대를 마감하고, 큰 꿈을 가지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DB의 시대를 시작하자"면서 "DB라는 이름으로 더욱 위대한 성공 기업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자"고 강조했다.
그 와중에 김준기 전 동부 회장은 비서 성추행 혐의로 고소 당했다. 미국에 머물며 출석요청에 불응한 김 전 회장에 대해 경찰은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 공조수사를 요청할 계획이다. 그룹명과 CI 교체가 무색할 정도다.
한화생명은 그룹 금융계열사인 한화손해보험, 한화투자증권, 한화자산운용, 한화저축은행, 한화인베스트먼트와 공동으로 본격적인 라이프플러스(Lifeplus) 브랜드 캠페인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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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화그룹 금융계열사인 한화생명, 한화손해보험, 한화투자증권, 한화자산운용, 한화저축은행, 한화인베스트먼트의 공동 브랜드인 ‘라이프플러스(Lifeplus)’
"한화 금융계열사의 공동브랜드 라이프플러스는 전통적으로 자산 증식과 금전 보상만으로 국한되는 금융업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디지털 중심의 금융서비스를 통해 우리 모두의 삶(Life)을 더 잘 살 수 있게(plus) 한다는 것이다. 고객의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콘텐츠와 서비스로 가치 있는 선택과 의미 있는 경험을 지속적으로 제공해 금융업의 본질을 혁신하겠다."
라이프플러스의 이미지가 주목받는 점은 ‘한화’라는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홈페이지 상의 ‘라이프플러스’ 브랜드에는 한화의 색깔인 ‘주황색’이 반영돼 있지만, TV 광고에선 그 색깔이 많이 빠져 있다. “삶은, 한 가지 색이 아닌 수만 가지 색이라는 것’이라는 광고 카피에서 말해주듯 다양한 색채를 보여줌으로써 그룹과는 다른 이미지를 보여줬다.
시장에선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차남인 김동원 한화생명 상무가 라이프플러스 브랜드 캠페인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점을 들어 계열 분리와 승계로 연결지어 보기도 한다. BI(Brand Identity) 캠페인이 CI 단계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얘기다. 김 회장 삼남 김동선 전 한화건설 팀장의 잇따른 폭행 사건으로 그룹 이미지가 추락하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금융은 곧 신뢰’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룹 이미지와 적정 수준의 거리감을 둘 수밖에 없다.
기업은 필요에 따라 자신의 얼굴을 새로 고칠 수 있다. 문제는 진정성이다.
CI는 다른 기업의 차이점을 표현해야 하고 지속성과 일관성, 해당 기업 문화 및 경영전략과 들어맞아야 한다. 국내 기업들의 CI 교체는 단지 기업 로고 바꾸기로 끝나 버린 경우가 많다. 이유는 위의 조건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총수의 허물을 덮거나 새로운 총수의 취임을 준비하는, 오너가 중심의 이미지 환기다. 소비자와 임직원들, 투자자들은 배제된 그들만을 위한 ‘화장’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의 본질은 손 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성형 수술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만족하는 것은 거울을 바라보는 그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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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7년 11월 24일 11:02 게재]
입력 2017.11.30 07:00|수정 2017.12.01 0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