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차원의 인사 없어지면서 얕은 인력풀 드러나
생명·화재 인사에선 약해진 영업력에 대한 우려 드러나
중장기적으로 금융지주사 형태의 CEO 프로그램 만들어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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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석방 이후 삼성 금융계열사 인사가 ‘속전속결’로 마무리됐다. 외부인사의 영입은 없었고 대부분 계열사 부사장을 사장으로 올리는 수준에서 끝났다. 끊임없이 지적돼 온 최고경영자(CEO) 양성프로그램의 부재와 함께 삼성그룹 순혈주의에 기반한 '좁은' 최고경영자(CEO) 인력 풀도 여실히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지난 9일을 기점으로 삼성 금융계열사 CEO는 전원 교체됐다. ▲삼성생명은 현성철 삼성화재 전략영업본부장(58)을 ▲삼성화재는 최영무 삼성화재 자동차보험본부장(55)을 신임 사장으로 내정했다. ▲삼성증권에는 구성훈 삼성자산운용 사장(56)이 ▲삼성자산운용에는 전영묵 삼성증권 부사장(53)이 선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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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를 필두로 시작된 ‘60대 퇴진론’에 따른 세대교체 바람은 금융사에도 불었다. 김창수 삼성생명 사장, 안민수 삼성화재 사장, 윤용암 삼성증권 사장은 모두 60대로 지난해 연말부터 퇴진이 점쳐졌다. 이들의 빈 자리는 모두 50대 부사장들이 채웠다.
금융계열사들은 이번 인사를 통해 세대교체에 성공했지만 얕은 CEO풀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삼성그룹이 이사회 중심의 경영체제를 선언하면서 이전과 같은 그룹차원의 인사가 사라졌다. 각 계열사 내부 승진을 통해 CEO를 선임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제까지 삼성 금융사 CEO는 삼성전자나 삼성물산 등 주요 계열사 출신들이 퇴임 전 거쳐가는 자리 정도로 인식되다 보니 새로운 체제에 대한 준비가 미흡했다.
금융사 인사를 앞두고 나왔던 생명과 화재 CEO 하마평도 삼성생명의 심종국, 방영민, 김남수 부사장과 삼성화재의 현성철, 이상묵, 최영무 부사장 등 6명에 불과했다. 금융일류화 추진팀 해체에 따라 인력풀이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사 인사 이전부터 CEO 인력풀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있어왔다”라며 “CEO 인사가 이전 하마평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현 부사장들 대다수도 이전의 CEO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과정을 밟아 왔다는 것이다. 당장 현성철 삼성생명 사장 내정자만 하더라도 제일합섬으로 입사해 삼성 기업구조조정본부와 삼성SDI 구매팀장을 역임했다는 점에서 전통 금융맨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금융사 경험이라고 해봐야 2011년 삼성카드 경영지원 실장과 삼성화재 전략영업본부장을 거친 정도다.
한 삼성그룹 관계자는 “이재용 부회장 구속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금융사 CEO는 그룹 비서실 출신들이 퇴임 전 가는 자리 정도로 인식돼 왔다”라며 “이번엔 정부 눈치를 보느라 그룹 간 인사 통로가 막힌 것도 이런 한계가 나타난 이유다”라고 말했다.
삼성생명의 ‘맨파워’에 대한 지적도 일고 있다. 사실상 금융사의 맡형 격인 상황에서 삼성생명 CEO는 삼성화재에서 맡는 것이 공식처럼 굳어지고 있다. 전임 김창수 사장도 삼성화재 사장을 거쳐 삼성생명 사장으로 취임했으며, 세대교체론이 불거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안민수 삼성화재 사장이 차기 삼성생명 사장으로 유력하게 거론됐다. 이번 인사에서도 삼성화재 부사장 출신이 삼성생명과 삼성화재 사장에 오르면서 보험 ‘맨파워’는 "삼성화재가 뛰어나다"라는 것이 다시금 입증됐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 지분을 가지고 있는 삼성생명은 그룹의 자금 줄, 보험을 통한 수익창출은 삼성화재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라며 “삼성생명 CEO가 되기 위해서는 삼성화재에서 보험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통념처럼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이번 인사를 통해 약해진 영업력에 대한 우려도 드러났다. 보험업계에선 삼성생명과 삼성화재 영업력이 이전과 같지 않다는 말들이 나왔다. 그간 삼성 금융사 CEO들은 영업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는 지적이 꾸준히 있었다. 이번 인사에서 영업쪽 경험이 있는 CEO를 앉힌 것도 점점 어려워지는 시장환경에서 영업력 강화 및 영업 일선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다른 삼성그룹 관계자는 “삼성생명과 삼성화재가 영업본부장을 사장에 앉힌 것은 현재 시장 상황이 녹록하지 않다는 방증이다”라며 “삼성생명의 경우 그룹의 순환출자고리 해결, 자본확충 등 CEO에 주어진 과제가 많다”라고 말했다.
앞으로 이런 체계가 굳어질 경우 삼성도 국내 금융지주사의 인사체계가 갖춰질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지주사 내에서 CEO 풀을 만들고 끊임없는 경쟁과 검증이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이사회 체제 확립으로 삼성금융사도 금융지주사 형태의 CEO 승계 프로그램 등을 마련할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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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8년 02월 11일 09: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