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비리 법적 다툼 여지 있어...우리은행 재판 결과 주목
금융당국 정당성 이미 의심받아...'관치 영향력 회복' 해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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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의 설립 근거인 금융위원회법의 서두엔 '금융기관의 자율성을 해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돼있습니다. 금융 현안이 산적한 이 시기에 '감독기관의 권위를 세우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 금융지주사 관계자)
채용비리 검사로 시작된 국내 민간 금융회사와 금융당국간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특정 금융사를 겨냥해 위압적인 발언을 내놓으며 자존심을 건 '파워게임' 양상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금융권에서는 '금융당국이 주요 금융지주 수장 교체기에 맞춰 영(令)을 세우려 하는 것 같다'며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금융감독원 내부 비리와 새 정부의 '탈 관치(官治)' 기조로 인해 금융사에 미치는 영향력이 줄어들자, 채용비리를 지렛대로 다시 줄 세우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최 위원장은 지난 13일 국무회의 자리에서 금융감독원의 하나금융지주·하나은행 특별검사와 관련해 "인력과 기간에 제한을 두지 않겠다"고 밝혔다.
최흥식 전 금융감독원장의 채용비리 연루 의혹에 대해서는 "(하나금융)경영진도 제보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인 추론"이라며 '하나금융 배후설'에 무게를 둔 발언을 했다. 이어 "감독 기관의 권위를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되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최 전 원장의 사표가 수리된 14일 오전, 금융감독원은 특별검사반 20명을 하나금융지주와 하나은행에 전격 투입했다. 조사는 4월2일까지로 예정돼있지만 필요시 연장이 가능하다. 검사 인력과 기간 면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규모다.
상황을 지켜보는 금융권의 표정은 침통하다. 이번 정부에서도 금융당국의 눈에 거슬리면 언제든 '철퇴'를 맞을 수 있다는 선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지렛대는 채용비리다. 지난해 말부터 진행된 채용비리 검사에 국내 대부분의 금융지주·은행들이 연루돼있는 상태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당국은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 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이 자신들의 '재가'를 받지 않고 이사회를 통해 연임을 결정한 게 불만인 듯 하다"며 "개정된 지 갓 1년 지난 지배구조법을 건드리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자, 관행이 고착화돼 '털면 먼지가 나올만한' 채용 부문을 타깃으로 삼은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금융위와 금감원의 연간 업무계획에 '금융회사 채용문화 개선'이 명시된 건 올해가 처음이다. 금융위원회는 금융회사의 채용과 관련한 모범규준까지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채용은 민간회사의 자율 영역으로 남겨두던 이전의 자세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금감원 내부에선 지난해 채용 비리 의혹에 연루된 이광구 우리은행장의 사임을 '소기의 성과'로 치부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다만 앞으로도 채용비리 의혹에 연루된 금융사들이 금융당국의 의도대로 움직여 줄지는 미지수라는 평가가 나온다. 금융회사의 일부 채용행위를 문제삼아 '비리'라는 낙인을 찍은 건 금융당국일뿐, 이를 위법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희박하다는 것이다.
채용비리의 대가로 금품을 받은 게 아니라면 뇌물죄 적용은 쉽지 않다. 업무방해죄나 배임죄를 적용하려면 해당 채용 행위로 회사의 임직원의 업무가 제한되거나, 회사가 손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이 역시 쉽지 않다는 게 금융권의 지적이다.
실제로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는 법원에서 기각됐다. 법원은 이 행장의 업무방해죄 등 혐의와 관련해 법률적 다툼의 소지가 있다고 봤다.
우리은행이 채용비리 논란을 빚은 2016년 당시 HR지원단 단장이었던 장안호 상무를 지난해 말 내부 검토를 거쳐 국내부문장으로 임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은행은 지난 2월 이광구 전 행장과 함께 장 부문장이 기소되자 일단 그를 직위해제했다.
이광구 전 행장의 첫 재판은 지난 12일 이뤄졌다. 다음 재판은 내달 16일로 예정돼있으며, 빠르면 상반기 중 결론이 나올 전망이다. 만약 법원이 이 전 행장의 손을 들어준다면, 채용 비리를 지렛대삼아 금융사들에 대한 압박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는 금융당국의 '정당성'이 오히려 이슈로 떠오를 수도 있다.
이미 금융당국은 정당성을 의심받고 있는 상황이다. 금감원이 '하나은행 VIP 리스트'의 존재만 공개한 것과 관련, 금융권에서는 리스트 안에 금융당국 관계자 및 정부 고위 공직자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게 아니냐는 평이 나온다. 우리은행 채용비리 사태에서도 금감원 임직원이 우리은행 검사실 임원에게 채용을 청탁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다른 금융사 관계자는 "대통령은 중소기업 자금 공급 등 금융혁신을 지속적으로 주문하고 있는데, 금융당국은 '관치 영향력 회복'을 최우선 관심사로 두고 있는 듯 하다"며 "금융당국은 지난해 하반기 금감원 내부비리로 인해 초대형 금융투자사업자 선정이나 신국제회계기준(IFRS17) 대응이 늦어졌던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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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8년 03월 19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