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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일. 전주에 위치한 국민연금 사옥이 모처럼 붐볐다. 하반기 사모펀드(PEF) 위탁운용사 선정을 앞두고 제안서를 내기 위해 운용사들이 몰렸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올 하반기 라지캡(Large-cap) PEF, 벤처펀드, NPL펀드 운용사를 뽑아 사상 최대 규모의 출자를 준비 중이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가장 관심을 받는 라지캡, 즉 국내 메인 PEF들이 참여할 수 있는 분야의 경쟁이 생각보다 저조했던 탓이다.
국민연금은 라지캡 분야에 총 8000억원을 출자를 계획하고 있다. 2곳의 운용사가 4000억원씩 연금으로부터 출자받아 각각 최소 8000억원의 펀드를 결성해야 한다.
중형급 PEF들은 이번 국민연금의 출자만 받을 수 있다면 국내 메이저 PEF로 등극할 수 있는 기회였다. 국내 PEF 중 조(兆) 단위 블라인드펀드를 보유하고 있는 곳은 MBK파트너스·한앤컴퍼니·IMM인베스트먼트 등 많아야 세 곳 정도다. 대형사들에는 조 단위 이상의 블라인드펀드 결성과 동시에, 프로젝트펀드에 목말라 있는 국민연금과 또다시 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라지캡 분야 제안서를 제출한 운용사는 5곳 남짓. 사상 최대 규모란 타이틀이 민망했다. 예상대로 IMM·H&Q·스틱을 비롯해 중소형 PE 2곳이 참전했다.
국민연금에 수차례 출자받아 레코드를 쌓아온 IMM은 일찌감치 참여를 결정했다. 국내 사모펀드 1세대이자 5년 만에 대규모 펀딩을 준비 중인 H&Q도 참여를 결정했다. 웅진과 손잡고 코웨이를 인수하겠다고 선언한 스틱도 블라인드펀드 결성이 절실한 상황이다.
국내외 활약이 두드러지는 나름 중대형 PE들은 일찌감치 발을 뺐다. VIG파트너스도, 스카이레이크도 불참을 선언하면서 7월 공고를 전후로 흥행에는 일찌감치 '노란불'이 켜졌다. 역시 반전은 없었다.
운용사들의 참여가 저조하자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경쟁률'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기금운용본부는 출자 사업 과정에서 '유효경쟁이 성립해야 한다'는 내규를 지키고 있다. 국민연금 측은 내규라는 이유로 '기준 경쟁률'에 관해선 말을 아꼈지만 '기존 경쟁률 기준은 매년 꾸준히 낮춰오고 있다'고 했다.
운용사들의 걱정도 컸다. 자칫 기금운용본부가 내규를 빡빡하게 지킨다면 두 자리 중 한자리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었다. 라지캡 분야는 아니지만 기존에도 이 같은 사례가 있었던 탓에 일정 수준 이상의 경쟁이 성립하는 것이 오히려 운용사들에 '희소식'이었다.
사실 국민연금으로부터 출자받을 수 있는 국내 대형사는 몇 곳 없다. 연금으로부터 4000억원을 받는다 한들 그만큼 이상을 추가로 펀딩할 수 있는 여력 또는 능력(?)이 되는 곳도 손에 꼽는다. 이렇다 보니 "차라리 올해는 너희가, 내년에는 우리가" 식의 사이 좋은(?) 경쟁도 가능하다.
돈 줄 곳은 마땅치 않은데 경쟁률을 걱정해야 하는 국민연금 입장에서도 나름의 고민은 이해 가능하다. 3곳 중에서 2곳을 주나, 5곳 중에서 2곳을 주나 매한가지인데, 말 그대로 공개할 수 없는 '내규' 때문에 출자 규모를 줄여야 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정성평가'의 비중을 높여 사업을 밀어붙이기도 어려운 처지다. 최고투자책임자(CIO)는 1년 넘게 공석인데, 실장급 투자책임자 대부분의 자리도 비어있다. 대체투자실만 보더라도 실장이 사임한 이후, 팀장이 직무 대리를 맡고 있다. 실무자들은 운용사, 자문사로 빠져나가는데 새로운 운용역을 충원하기가 쉽지 않다.
매년 반복되는 수익률 논란, 국정감사, 감사원 감사 등에서 질타를 받으면서 유연한 기금운용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해당 지역에 기반 정치인, 기업가 비롯해 전주지역 투자에 힘써 달라는 요청(?)도 무시할 수 없다. 짧은 2년의 임기도 다 채우지 못한 CIO가 수두룩하고, 이 같은 상황에 환멸을 느껴 떠난 임원도 적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실무급 인사들이 목소리를 낸다는 것을 기대하긴 어렵다.
국민연금은 한때 자본시장 대통령으로 불리던 CIO 인선을 진행 중이다. 외풍을 막고 기금운용에만 집중해야 할 자리다. 기금의 규모는 매년 커지고 기업 경영에 관여할 통로는 넓어지고 있다.
세계 최대 기금 규모를 자랑하는 국민연금의 CIO 자리가 오랫동안 비워진 것은 단연 문제다. CIO가 바뀐다고 연금이 하루아침에 달라지진 않는다. CIO가 국민연금의 구조를 모르는 CIO가 오면 2년의 임기 중 운용철학을 이해하는 데만 1년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CIO 선전도 중요하지만 연금의 운용원칙을 바로 세우고, 정치적 CIO를 견제할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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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8년 09월 23일 07:00 게재]
입력 2018.09.27 07:00|수정 2018.09.28 0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