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증시 사상 최대 규모 기업공개(IPO)로 꼽힌 소프트뱅크그룹의 통신사(소프트뱅크) 상장이 결국 ‘반쪽짜리 성공’으로 끝났다. 주식거래 첫날, 공모가 대비 주가가 14.5% 하락하며 체면을 구겼다. 다소 짓궂은 해외 언론(Financial times)은 ‘손정의(마사요시 손) 디스카운트(SoftBank: Unpacking the massive Masa Son discount)’로 해당 소식을 전했다.
손정의 회장은 상장 직전인 지난 6월 소프트뱅크 주주총회에서 "지금까지 97%의 에너지를 통신에 쏟고 3%를 투자에 썼지만 이제부터는 97%를 투자에 쓰겠다"며 특유의 자신감을 뽐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일부 체면은 상했지만 구주매출로 약 26조원의 실탄을 마련한 점 정도가 위안거리다. IB업계에선 이 돈을 비전펀드 LP들의 반대로 차질을 빚었던 공유오피스 업체 ‘위워크(WeWork)’ 인수에 쏟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바다 건너 서울 을지로에서 이 과정을 지켜봤을 SK텔레콤(SKT)의 주요 임원들, 어쩌면 박정호 사장의 속내는 어땠을까.
사실 박정호 사장의 ‘통신업 탈피’ 의지는 손정의 회장 못지 않았다. 이미 지난 2017년 첫 중간지주사 계획을 드러내며 "우리가 앞으로 하려는 성장 사업들이 규제 사업(통신업)에 묻어가다 보니 성과가 드러나지 않는다"며 "(내부 직원들이)신사업에서 실패하더라도 '그러려니'하는 사례들이 너무 많다"고 발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공식‧비공식 자리에서 통신사 느낌이 물씬 나는 'SK텔레콤‘이란 사명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을 정도다.
올해 들어선 중간지주사 추진을 더 명확히 하며 밑그림을 제시했다. 박 사장은 "통신(MNO) 자회사를 상장 폐지한 이후 곧바로 순수한 통신사업자로 재상장해 통신만 투자하고 싶은 투자자에게 기회를 줄 것”으로 설명했다. 소프트뱅크그룹이 걸었던 길을 벤치마킹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알려진 대로 통신회사 상장을 통해 마련되는 공모자금은 SKT의 중간지주사로 유입, M&A와 지배구조 개편에 필요한 재원으로 쓰이게 될 예정이다. 이미 박정호 사장이 직접 SK하이닉스의 지분율 상향 의사를 밝힌 만큼, 가장 첫 순위는 하이닉스 지분 매집일 가능성이 크다. 공모 규모는 물론 유입 대금에서부터 벌써 내년도 가장 큰 IPO 대어(大魚)로 거론되는 상황이다.
문제는 재원 마련의 핵심 수단인 통신사 상장이 삐걱거릴 경우. SKT의 중간 지주 전환에도 줄줄이 타격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자연스레 투자업계에선 “그 손정의도 투자자 설득이 쉽지 않았는데...SKT가?”란 우려가 나온다.
단연 가장 먼저 언급되는 요소는 양 사의 체급·인력 수준 차이. 최근들어 손정의식 투자에 대한 우려들이 나오지만 적어도 소프트뱅크는 ‘숫자’는 명확히 보여왔다. IPO 직전인 올 10월엔 무려 100조원 규모 비전 펀드의 자금 조달도 마쳤다(Closing). 이 과정에서 사우디 왕세자를 비롯한 글로벌 전주(錢主)들을 설득한 무기는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4차산업혁명‧5G‧자율주행’등이 아닌 '18년 평균 내부수익률(IRR) 44%‘란 명확한 숫자다.
물론 최근 국내 M&A시장에서 단연 큰 손은 SKT인 점은 부인할 수 없다. ADT캡스를 3조원에서 300억원을 깎아 인수했다. 11번가에도 뭉칫돈을 끌어왔다. 구조상 전환사채(CB)랑 다른 게 없다는 의구심도 나왔지만 적자사업부의 구조조정 동력을 확보했다. 지난해엔 베인캐피탈의 LP로 참여해 일본 도시바 투자도 마쳤다.
SKT가 전략적투자자(SI)인 만큼 PEF처럼 운용되는 소프트뱅크와 IRR로만 비교하긴 어려울 수 있다. 다만 업력이 수년간 쌓인 업계 '선수'들도 “어디에 투자했다는 소식은 웃어넘기지만 회수를 잘했단 소식엔 배가 아프다” 라고 입을 모은다. 그나마 하이닉스 인수라는 M&A 신화가 있지만 박정호 사장과 SKT 임원들의 공이라기보단 당시 최태원 회장의 특수 상황이 영향을 끼친 거래란 시각이 여전히 투자업계에 짙다.
국내 통신업을 둘러싼 환경조차 밝지 않다. 소프트뱅크도 상장 직전 통신장애에 화웨이 장비 논란까지 악재들이 겹치며 주가 하락에 불을 붙였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국내 통신사가 직면한 상황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정부 주도의 요금 인하 압박은 이미 상수다. 투자자 사이에서는 ‘발전소처럼 통신사들도 적정 마진만 얻으라는 게 정부 스탠스’란 시각이 파다하다. SK그룹과 친밀한 일부 자문사 사이에서까지 “현 코스피(KOSPI) 투자환경에 통신업종이다보니 외국인 투자자를 끌어오는 일이 쉽지 않을 것”으로 손사래 친다.
중간 지주 전환을 위한 물적분할은 이사회는 물론, 주주총회 결의사항인 만큼 결국 주주들의 동향도 변수다. 일부 금융기관을 비롯한 SKT의 주요 주주들은 벌써부터 회사의 의도만큼 주총 통과가 쉽지 않을 것이라며 전열을 다지고 있다. 소프트뱅크만 해도 투자설명서에 일찌감치 순이익의 85%를 주주에게 배당하겠다는 당근을 제시했음에도 좋지 않은 성적표를 받았다. SKT는 지난해와 올해 반도체 초호황을 맞은 SK하이닉스의 순이익을 외부에 배당하는 대신 유보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미 주주들의 집중포화를 맞은 바 있다.
한 기관투자가는 "박정호 사장이 내비친 비전이 사실 포장은 잘 됐지만 냉정히 보면 가장 수혜를 보는 건 대주주"라며 “특히 공모 자금을 자회사(SK하이닉스) 지분을 늘리는 데 쓰는데 대한 찬반도 치열히 갈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른 기관투자가는 "박정호 사장이 SKT를 바라보는 시각에 100% 동의하고 변화가 필요한 건 맞다"면서도 "다만 주주입장에선 이번 이벤트를 제외하곤 자기 목소리를 낼 만한 기회가 없기 때문에 순순히 찬성표를 던지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SK그룹은 연말 인사를 통해 박정호 사장에게 자회사 통제력까지 부여했다. 주요 임원을 자회사로 파견해 채비도 갖췄다. 이를 두고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재가가 떨어진 것으로 해석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만큼 향후 상장이 부진할 경우 박정호 사장은 물론, 국민연금에조차 “그룹에서 당분간 가장 핵심 임원이 될 것”이라 소개됐다는 SKT 임원들의 명성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잘못하면 '손정의 디스카운트'처럼 '박정호 디스카운트'가 내년도 한 해 SKT의 고민으로 남을지 모른다.
-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8년 12월 26일 07:00 게재]
입력 2019.01.04 07:00|수정 2019.01.08 0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