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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행동주의펀드’란 단어는 어느덧 고유명사가 됐다. 한진칼과 SM엔터테인먼트 등 업종을 대표하는 주요 기업들은 행동주의펀드의 주요 타깃이 됐고, 주가 상승을 기대하는 개인투자자들에겐 가장 뜨거운 종목이 됐다. 자산운용사들 사이에선 이미 ‘행동주의펀드’ 결성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나타난 성과는 아직 미미하다.
▲‘도덕성’을 강조하며 오너와 ‘선과 악’의 구도를 만드는 전략 ▲잡음과 이벤트로 주가를 부양하려는 노력 ▲전문성을 갖춘 이사진 풀(Pool)의 부재 ▲개인 투자자가 아닌 외국계 또는 대형 기관투자가들을 우군으로 확보할 수 있는 장기적 비전의 부재 등 주주들의 지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전략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한국형 행동주의펀드의 한계로 꼽힌다.
저성장 국면에 직면하면서 대기업들의 실적 저하는 이미 시작됐다. 국내 주식시장은 붕괴했고, 당장 내년을 기약할 수 없는 기업들의 위기 의식은 확산했다. 경영권을 뒤흔드는 행동주의펀드의 설자리가 점점 좁아질 것이란 우려도 나오기 시작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현대자동차그룹을 위협하던 미국계 행동주의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Elliot Management)의 공세는 다소 잦아들었다. 지나치게 과도한 배당요구와 같은 주주제안을 비춰볼 때 엘리엇을 행동주의펀드의 ‘정석’ 또는 ‘절대선(善)’으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다만 현대차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엘리엇의 공세 이후, 현대차의 변화는 눈에 띈다. 정의선 수석 부회장은 현대차를 모빌리티 기업으로 변모시키겠다는 장기 비전을 발표했고, 각 업계에서 활약한 전문성을 갖춘 외국계 사외이사를 선임하며 다시 있을지 모르는 공격의 ‘명분’을 차단했다. 각 계열사들은 국내외 기관투자가들을 대상으로 한 IR활동을 크게 늘렸다. 동시에 배당을 확대하며 주주들의 불만을 잠재웠다. 대외 변수로 인한 대기업들은 부침을 겪고 있지만, 이로 인해 현대차는 몇 안되는 성장세를 보인 기업 중 하나가 됐다. 현대차 계열사들의 주가가 현재와 같이 상승세를 이어간다면, 엘리엇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다.
엘리엇이 현대차의 경영권을 위협할 의지가 있었는 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엘리엇은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의 체제를 부정하진 않았다. 어쩌면 회사의 구심점을 건드려서 득(得) 될 게 없다는 판단이었을 수도 있다. 경영권을 찬탈하겠다는 ‘의지’ 대신 자산의 배분과 이사진 전문성 강화를 요구하는 등 철저하게 ‘사업’의 측면에서 공세를 이어갔다.
몇번의 실패를 거치며 한층 세련되진 엘리엇은 최근의 주총 직전까지 외국인 투자자들을 규합하며 현대차를 위협하는 감시자 역할을 했다. 이는 미국 소프트웨어 업체 시트릭시스템즈(Citrix Systems), 호주 광산업체 BHP빌리턴(BHP Billiton), 미국 항공우주부품업체 아르코닉(Arconic) 등 글로벌 기업들을 상대로 주주권을 행사하며 성공한 경험 덕분이기도 했다..
이는 조원태 회장 및 오너일가, 이수만 프로듀서를 공략한 한국형 행동주의펀드들과는 다소 대조적이다.
물론 오너일가의 도덕적인 전횡 또는 오너 개인 회사와의 찝찝한 거래 등 투자자 눈높이에서 개선점을 제시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개인적 일탈’과 또는 ‘도덕적 해이’를 명분으로 삼아 회사의 경영권을 흔드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오너가 두 손, 두 발을 들고 물러난다면? ‘직접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또는 ‘그럴 의지가 있는가’는 행동주의펀드에 동조하는 투자자들이 한번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회사의 경영권 거래를 주목적으로 하는 국내 사모펀드(PEF) 운용사 한 대표는 “수십년 간 바이아웃펀드를 운용하면서 가장 힘든일은 최대주주로서 기존 경영진들을 규합해 회사 시스템을 보다 더 합리적으로 바꿔 체질을 변화시키는 일이었다”며 “한국에서 이제 막 자리잡기 시작한 행동주의펀드들이 과연 장기적 관점에서 회사를 바라 볼 의지가 있는지, 또는 경영할 능력이 있는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사진 쇄신으로 경영의 중대한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준비’도 아직은 미흡하다.
현대차에 추천한 엘리엇의 사외이사진은 면면이 화려했다. 최종적으로 선임되진 못했으나, 자동차 업계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은 이사진의 추천은, 현대차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의지로 비춰지기도 했다.
과거 미국계 행동주의펀드인 트라이얼펀드는 프록터 앤드 갬블(P&G)의 소수 지분(1.5%)을 보유하며, 사측과 위임장 대결을 펼쳤고 결국 이사회 의석을 차지했다. 이후 ‘지배구조의 변화’ 또는 ‘자사주 매입’과 같은 기술적 측면의 주가 부양이 아닌, ‘밀레니얼 소비자에 대한 경영전략 요구’ 또는 ‘신규 브랜드 육성’과 같은 경영의 패러다임 변화를 제시했다. 트라이얼펀드 추천 인사가 이사진으로 재직하는 동안 P&G의 주당순이익 성장은 S&P 500 지수 대비 7% 이상 높았고, 기업의 TSR(total shareholder return) 또한 S&P 500 지수 대비 8.8%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반면 한국을 대표하는 행동주의펀드가 한진칼에 추천한 사외이사 후보들은, 거수기 역할에 그쳤던 기존 관료 또는 학자 출신의 이사진의 면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행동주의펀드를 차치하고, ‘펀드’란 이름을 가진 투자자의 ‘제 1목적’은 수익의 극대화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주식을 사서, ‘적당한 타이밍’에 팔고 투자자들에게 배분하는 게 원칙이다. 이를 위해선 오랜 기간 동안 함께할 출자자(LP)를 확보하거나, 외부의 투자자들을 지속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명분’과 ‘전략’이 분명해야 한다. 섬세한 경영적 판단을 바탕으로 한 세밀한 접근 없이는 이벤트를 만들어 주가를 부양하고 빠지는 ‘단기 투자자’, ‘기업 사냥꾼’의 오명을 쓰기 십상이다. 특히나 적대적 M&A의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 시장에선 더욱 그렇다.
‘오너’의 전횡에 맞서겠다는 대표적인 한국형 행동주의펀드는 이미 ‘엑시트 타이밍’을 놓쳤다. ‘명분’을 생각하면 투자자금을 빼기도 어렵고, '한정적인 자금'을 고려하면 무턱대고 지분을 사들이기도 어려운 상황이 됐다.
기관투자가들이 동조할만한 전략은 보이지 않고, 한 때 동조하던 개인투자자들마저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초기엔 행동주의펀드의 ‘발표’에 한진칼의 주가는 급등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현재는 ‘발표’ 이후 오히려 주가가 빠지는 현상마저 생기고 있다. 공세 초기에 밀어부쳤던 ‘명분’은 어느덧 흐릿해졌다. 이제는 오너일가를 만나겠다고 ‘선언’하면서 그들에게 면박(?)을 주던 모습은 초라해졌다.
국내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이렇게 지적했다.
“한진그룹 오너에 대한 견제는 누군가는 했어야 하는데 안한 것은 사실이다”며 “다만 펀드가 사회 정의를 얘기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선과 악, 또는 정의로움과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 보게되면 모든 게 꼬인다. 좋은 타이밍에 주식을 사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다. 다만 목적을 갖고 투자했어도 적정 수익률이 나면 엑시트를 해야하는 데 도덕적 ‘명분’을 앞세우면서 적정한 타이밍에 나올 수 없는 포지셔닝이 돼버렸다.”
중소형 운용사들 사이에선 행동주의펀드 결성이 인기다. 주식 시장은 기업의 펀더멘털보다는 이벤트에 출렁이는 현상이 고착화했고, 이같은 상황을 잘 이용해 ‘기회’를 노리겠다는 운용사들도 상당 수 보인다. 이들이 어떠한 경영 철학과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행동주의펀드를 표방해 주주권을 행사할 지는 검증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행동주의펀드를 표방한 운용사들의 ‘건드려 보자’식의 투자로 피해를 입는 것은 장기투자자와 이에 동조한 개인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주식 시장이 붕괴하면서 기업들의 투자활동은 더 위축했다. 삼성전자는 대대적인 주주환원책 시행을 연기했다. 대외 변수는 산적했는데, 실적마저 꺾이면서 어느 때보다 위기감이 커졌다. 비단 삼성전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다수 기업들은 활발한 투자발표와 대규모 주주환원책을 내놓고 싶어도 내놓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한국형 행동주의펀드들에 대한 우려는 커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한국형 행동주의를 표방한 운용사들이 기업의 숨은 가치 제고를 통해, 투자자들의 수익 또한 극대화하는 ‘진정한 행동주의’인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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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9년 08월 09일 07:00 게재]
입력 2019.08.14 07:00|수정 2019.08.16 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