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대상 '법'으로 제한은 국제법상 문제 될 수 있어
'재검토중' 밝힌 국민연금....전범기업 정의 등 '원칙' 필요
'ESG 책임투자'가 정치적 문제 되는 것은 경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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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수출 규제로 불매 운동이 확산되는 등 반일(反日) 여론이 확산되면서 국민연금의 일본 전범기업 투자 문제가 주목받고 있다. 국민연금이 환경·사회·지배구조(ESG)를 고려하는 ‘책임투자’를 확대하는 가운데 ‘일본 전범기업’이 투자 대상에서 제외될 지 관심이 집중된다.
충분한 검토와 합리적인 근거 없이 국민연금이 ESG를 활용해 투자 제한에 나설 경우, 국민의 노후 자금인 국민연금이 독립성을 잃고 정치적 갈등의 볼모가 됐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국민연금은 올 9월까지 ESG 활용의 구체적 방법이 담긴 ‘책임투자 활성화 방안’을 마련해 발표할 예정이다. 해당 안에는 ESG 측면에서 부정적인 기업 투자를 배제하거나 줄이는 '네거티브 스크리닝(Negative Screening)’ 방식 도입 등이 담길 예정이다.
최근 한일 갈등의 연장선상에서 세계제2차대전때 군수물자를 담당하는 등의 책임이 있는 일본 '전범기업'이 투자 제한 대상이 될지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당장 정치권에서 일본 전범기업에 투자하거나 거래를 금지하는 법안이 잇따라 발의되고 있다. 국민들 사이에 반일 감정이 고조되자 정치권도 덩달아 부추기기에 나선 것이다.
여론에 밀려 투자 포트폴리오를 조정한 사례로는 지난 2015년 한국투자공사(KIC)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당시 미국계 사모펀드 앨리엇매니지먼트가 삼성물산을 공격하자, 비난 여론에 직면한 KIC는 앨리엇에 투자한 자금을 회수했다. 지금도 KIC가 일본 전범기업에 투자한 5000억여원을 회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국민연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투자시장에서 국민연금이 일본 전범기업과 ESG 기준을 연계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묻는 움직임이 포착되기도 했다. 김성주 국민연금 이사장 역시 투자 대상에서 제외할지에 대해 검토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내놓은 상황이다.
ESG 관련 투자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의 일본 전범기업 투자 제한이 성급하게 이뤄져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타당성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론에 휩쓸려 방안을 마련하면 자칫 역풍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국민연금은 국민들의 노후 보장을 위해 수익성을 최우선으로 배려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현재의 한일 갈등은 양국의 경제성장률을 양 쪽으로 갉아먹는 '치킨 게임'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특히 전범기업에 대한 투자를 법안으로 제한할 사항은 아니라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의 공통된 견해다. 법으로 국민연금의 투자 대상을 제한하면 WTO(국제무역기구) 등에서 논쟁 소지가 있다는 관측이다.
역사 문제와 양국 관계를 환경·사회·지배구조의 어디에 포함시킬지도 쉽지 않은 문제다. 일단 '사회'에 가깝긴 하지만, 해당 이슈는 근로자 인권·기간제 및 여성근로자 비중·협력사 상생 및 공정거래·부패방지 등 '사회 공헌'에 가까운 항목이다. 전범기업에 투자하지 않는다고 해서 국민연금이 'ESG 원칙에 충실한 투자를 하고 있다'고 인식할 순 없다는 평가다.
예컨대 현재 소비자 반일 운동의 핵심 타깃이 되고 있는 한국 유니클로의 경우 장애인 근로자 고용률이 5.3%로 고용노동부에서 지정한 의무고용률 2.9%의 두 배에 가깝다. 이런 기업에 대한 투자를 철회하는 게 ESG의 '사회책임투자' 원칙과 맞는지는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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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으로도 실현이 쉽지 않다. 전범기업 투자를 배제하면 상당수의 일본 기업들이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국민연금의 전체 해외 투자대비 일본에 투자한 비중은 6.3%에 달한다. 네거티브 스크리닝을 적용할 경우 ‘전범기업 투자’의 범위를 어디까지 볼 것인지도 문제다. 특정 회사의 이익이 몇 % 반영된 곳 이상, 혹은 해당 기업의 모든 서플라이 체인(생산 및 공급 과정)에 해당하는 곳엔 투자하지 않겠다는 점 등을 규정해야 한다.
한 ESG 전문가는 “국민연금이 전범기업을 투자 대상에서 제외하려면 명확한 투자 철학과 원칙 아래 국민적 합의가 있다는 타당성을 입증해야 할 것”이라며 “국민연금 내에서도 고민이 많다고 전해지는데, 9월까지 적어도 일관적인 책임 투자 원칙과 전범기업에 대한 정의와 범위 등 구체적인 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행 국민연금법은 사회책임투자에 대한 구체적인 투자방법이나 원칙, 기업 등은 언급돼있지 않다. 국민의 노후자금인 국민연금기금을 관리, 운용하면서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수익 증대를 위해 투자대상과 관련한 비재무적 요소인 ESG 등을 고려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국민연금이 스스로 세운 자금 운용 원칙 아래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투자를 제한할 수는 있다는 설명이다. '국민이 원하지 않는 곳엔 투자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천명하고 대상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국민연금은 투자제한 대상 선정기준과 관련해 해외 연기금 사례를 참고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네거티브 스크리닝 방식을 책임투자에 활용하고 있는 해외 연기금은 무차별 살상, 대규모 인명피해, 인권 탄압, 환경 훼손 등을 기준으로 제한 기업을 정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네덜란드 공적연금(ABP)은 '자금의 출처인 국민의 정서에 반하거나 국민을 위협하는 곳에는 투자 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책임투자 원칙과 ESG 평가 지표는 일관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마다, 기관마다 다르다. 이에 국민연금이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이고, 김성주 이사장은 내년 지역 총선 출마가 유력한 정치인이기도 한 점을 고려하면 ‘독립성 유지’가 관건이라는 분석이다.
한 지배구조 전문가는 “국민연금의 일본 전범기업 투자 이슈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점은 맞지만 정치적 문제가 돼서는 안 된다”며 “기본적으로 연금의 중장기적 목표가 ‘수익성 향상’인 만큼 기업 투자 결정은 기업 분석이 우선돼야 하지 그때 마다 발생하는 이슈에 따라 배제되는 식은 ‘사회책임투자’ 원칙이 왜곡될 소지가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