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안 급급…성사 가능성은 뒷전
-
대기업들은 일찌감치 다음 10년을 바라보고 있다. 거창한 2030 비전을 외치지만 불안정한 국내외 정세, 갈수록 악화하는 경제 활력을 감안하면 현실성이 떨어진다. ‘10년 대계’를 기존의 고민을 답습하거나 정부 정책 등 시류에 맞춰 급작스레 내놓는 실정이다.
대기업 오너와 경영진은 진지한 고민 대신 '보여주기식 화두' 설정에 공을 들이고 있다. 기업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첫발도 떼지 않은 2030 전략이 큰 소득 없이 막을 내려가는 2020 이상의 공수표가 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
목전 다가온 비전 2020, 기업들 성적표는?
여러 그룹들이 2010년을 전후해 내놨던 2020 전략의 성적표는 신통치 않다. 1년 남짓한 기간에 달성하기 어려워 보이는 것들이 많다.
삼성전자는 창사 40주년을 맞은 2009년, 2020년까지 매출 4000억달러(약 470조원)와 글로벌 10대 기업 도약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포브스 발표 상장사 순위 13위에 올랐는데, 작년 연결기준 매출은 243조7714억원으로 갈 길이 멀다.
현대자동차그룹은 2010년 비전2020을 준비하면서 10년 뒤 글로벌 3강 자리에 오르겠다는 내부 전략을 세웠다. 단기간에 글로벌 빅4의 아성을 넘기 쉽지 않다. 2011년 인수 후 2020년까지 매출 55조원의 기업으로 키우겠다고 했던 현대건설은 지난해 16조7308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SK그룹은 SK㈜와 SK C&C의 합병을 알리며 2020년까지 매출 200조원을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SK㈜의 작년 매출은 그 절반 수준이다. 롯데그룹은 신동빈 회장이 정책본부장이던 2009년 2018년 매출 200조원 달성을 목표로 내걸었다가, 2016년 대폭 수정된 2020 비전을 새로 내놨다. 그룹의 한 축으로 꼽았던 금융은 존재감이 약해졌다.
2020년 그룹 매출 100조원이라는 ‘그레이트 CJ’를 표방한 CJ그룹도 일찌감치 목표 달성이 어려워졌다. 회장에 따라 방향이 오락가락하는 포스코그룹은 장기 전략에 큰 의미를 두기 어렵다. 작년 최정우 호가 출범하며 사상 최대 투자를 외쳤지만 벌써 힘이 빠지는 모습이다. 내실있는 지속 성장을 통해 2020년까지 매출 140조원 달성하겠다던 한화그룹의 목표도 요원해진 지 오래다.
2030 속속 등장하지만 기존 고민 답습에 그쳐
대기업들은 2020을 뒤로 하고 저마다 새로운 2030년을 그리고 있다. 장기 계획은 숫자보다 그룹이 어떤 먹거리를 구상하느냐 하는 ‘정성적 요소’가 중요한데, 신선한 화두는 찾아보기 어렵다.
삼성전자는 올해 133조원을 투자해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글로벌 1위에 오르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당장 보이는 숫자는 크지만 실질은 경상적 투자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비메모리 반도체 강화는 이건희 회장 시절부터 강조돼 왔다. 2020의 5대 신수종 사업(태양전지·자동차용 전지·LED·바이오 제약·의료기기)은 지난해 4대 미래성장사업(인공지능(AI)·5G·바이오·전장)으로 탈바꿈했다. 이는 거의 모든 IT기업들의 지향점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작년말 ‘FCEV(수소전기차) 비전 2030’을 발표했다. 2030년까지 국내에 연 50만대 규모 수소전기차 생산 체제를 구축하기로 했다. 수소전기차 모델은 거의 20년 전에 개발됐고, 2013년 양산 모델까지 출시됐지만 아직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기술 완성도가 높고 정부의 전폭적 지원도 있다지만 목표 달성을 낙관하긴 어렵다.
-
롯데케미칼은 올해 2030년까지 매출 50조원, 세계 7위 글로벌 화학사 도약 목표를 내놨다. 질적 성장을 천명한 롯데그룹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기업이다. 올해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환대를 받기도 했는데 아직 갈 길이 멀다. 작년 매출은 16조5450억원이다.
CJ그룹은 2030년 세 개 이상의 사업에서 세계 1위가 된다는 ‘월드베스트 CJ’에 힘을 싣고 있다. 2017년 이재현 회장이 경영에 복귀하며 밝힌 구상으로 이를 달성하려면 대형 글로벌 M&A는 필수다. 전 계열사가 ‘그레이트 CJ’를 위해 경쟁적으로 확장 전략을 펴는 동안 곳간은 비었고 신용등급 하향 압력은 커졌다. 월드베스트 CJ 달성으로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지 미지수다.
한 자문사 관계자는 “삼성이 이런저런 전략을 내놓고 있지만 기존의 답습이 많고 이재용 부회장만의 전략이나 색채를 찾아보기 어렵다”며 “급작스레 그룹을 이끌게 된 구광모 LG그룹 회장도 어떻게 자기만의 전략을 설정할 지 고심이 깊을 것”이라고 말했다.
승계, 정부, 전략 부재…불확실성 내몰리는 기업들
장기 전략의 특성상 어느 정도의 오차는 필연적이다. 몇 년이면 그룹 주력도 바뀌는 상황에서 10년을 점치긴 쉽지 않다. 전략을 세우는 입장에선 성장의 의지도 담아야 한다. 매년 10%씩은 성장할 것으로 보면 10년 후엔 기업이 2.6배가 된다. 이미 덩치가 큰 기업들이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가 제시될 수밖에 없다.
장기 전략이 항상 허황되고 무모했던 것은 아니다. 총수의 과감한 방향 설정이 그룹이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됐던 사례가 많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 후 삼성그룹은 급성장했고 국가 경제의 중추가 됐다. 내부 용어집에 ‘한 방향’이라는 단어를 담으며 일관성 있는 움직임을 독려하기도 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품질 경영’ 화두는 외환위기 후 적자에 허덕이던 그룹을 되살렸고, 구본무 전 LG그룹 회장이 힘을 실은 디스플레이와 2차전지는 그룹의 핵심 먹거리로 성장했다.
대를 거듭할수록 대기업들의 고민은 가벼워지고 있다. 10년의 미래가 달린 중대한 사안을 눈앞의 사안에 맞춰 정하는 사례가 늘었다.
특히 승계 등 총수 일가와 관련된 문제가 얽히면 그룹 전략이 흔들린다. 5대그룹 모두 2020 수행 과정에서 총수가 바뀌거나 자리를 비운 경우가 있었고, 일관성 있는 움직임을 보이기 어려웠다. 삼성그룹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합병하며 2020년까지 매출 60조원의 회사로 키운다는 대의 명분을 제시했지만 허상이었음이 입증돼가고 있다. 아직 승계 작업이 완료되지 않은 그룹들이 경영권 유지를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할수록 장기 목표는 더욱 무의미해진다.
정부의 압박도 대기업의 눈을 흐리게 한다. 승계 문제든 정책 지원이든 나름의 고민을 안고 있는 기업들이 ‘산업 1위 달성’, ‘산업 육성’, ‘고용 창출’ 등 정부가 내거는 구호를 외면하긴 쉽지 않다. 이에 적극 화답하려면 더 크고 그럴싸해 보이는 계획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달성 여부는 뒷전이다.
총수의 이상은 높은데 그룹의 현실 역량이 뒷받침 되지 않아 그룹이 허덕이거나 와해되는 경우는 많았다. 경영진의 책임있는 결정도 기대하긴 어렵다. 3년, 5년의 단기 전략은 성과 평가에 연동되지만 10년 후의 결과와는 이해관계가 없다. 총수든 경영진이든 근사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데까지만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다른 자문사 관계자는 “장기 전략을 수립할 때 업황 침체가 불보듯 뻔해도 총수 일가나 경영진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긍적적인 면을 억지로 짜내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9년 09월 18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