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자본시장서 다시 활발한 움직임
시장선 産銀 공격적 영업 방식 성토
민간 영역 침해?…결국 정체성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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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자본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산업은행이다. 한동안 주춤했지만 연초부터 적극적인 영업에 나서고 있다. 구조조정, 혁신성장 지원에 이어 돈도 잘 벌겠다는 다짐을 현실화해가는 모습이다.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산업은행의 존재감은 앞으로도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산업은행과 경쟁 관계에 있는 자본시장 참여자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국가에 준하는 위치의 산업은행이 작정하고 시장에 뛰어들면 경쟁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조달 금리를 앞세운 공격적인 영업 방식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문제는 결국 산업은행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로 회귀한다. 설립 목적은 그대론데, 정책 방향에 따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뒤바뀌는 경우가 많았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국내 활동을 최소화하는 데 집중했다. 산업은행의 역할이 자주 바뀔수록 시장의 공감을 얻기 어렵고, 마찰도 피하기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은행은 돈을 벌어야’…자본시장서 적극 활약
산업은행은 2013년 민영화 작업이 중단된 후 활동 반경을 좁혔다. 2015년엔 정부가 자본시장 영역 축소를 주문하기도 했다. 해외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 산업은행의 역할이 절대적인 영역을 제외하면 M&A 자문이나 부채자본시장(DCM), 자금 대출 등 부문에선 입지가 줄었다.
올해 들어 분위기가 달라졌다. ‘은행은 돈은 벌어야 한다’는 명제 아래 자본시장에서 힘을 내기 시작했다. 부서마다 연초 할당된 목표를 채우기 위해 분주한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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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자문 분야에선 산업은행 M&A컨설팅실이 JKL파트너스와 퀸테사인베스트먼트의 파낙스이텍 매각 자문사로 나서 거래를 성사시켰다. 스틱인베스트먼트의 유비케어 매각에서도 자문을 맡고 있다. 몇몇 구조조정 성격 거래에도 기여했다.
내부 업무도 꾸준히 이어졌다. 5000억원 규모 아시아나항공 전환사채(CB) 인수 업무에 관여했다. 아시아나항공 매각이 완료되고 CB가 상환되면 그에 대한 기여분도 인정받을 전망이다. 대우조선해양 매각도 M&A컨설팅실의 주요 과제다. 동부제철 M&A에도 힘을 보탰다. 황길석 실장이 조직을 이끌고 있다.
DCM 시장에선 중견 건설사 한양의 회사채와 노무라인터내셔널펀딩 아리랑본드 발행 공동 주관사를 맡았고, 대한항공과 두산인프라코어 등 자금 상황이 녹록지 않은 기업들의 채권에 보증을 제공해 신용도를 보강해줬다.
기업자금 대출, PF, 인수금융 등 자금을 직접 지원하는 영역에서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특히 인수금융 부문에서 활동이 뚜렷하다. 안영규 실장이 이끄는 기업금융1실이 담당 업무를 맡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의 서브원 인수금융을 단독 주선했고 KCC컨소시엄의 모멘티브 인수에서도 일부 자금을 댔다. 상반기 KKR의 LS오토모티브 및 KCFT 인수금융 리파이낸싱 공동 주관 업무를 맡았고, SKC의 KCFT 인수금융 주선도 관심을 보였다.
최근엔 태림포장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세아상역의 인수금융 주선사로 선정됐다. 사상 최대 거래가 될 뻔 했던 넥슨 M&A 인수금융 주선 검토도 빼놓지 않았다. 대형 거래에 적극 공을 들였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지난 2~3년간 자금을 풀지 않고 리스크 관리에만 집중하다가 올해부터 자산 확대로 방향을 틀었고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조달금리 앞세운 산업은행 영업 방식 성토
자본시장에선 산업은행의 약진이 반갑지 않은 눈치다. 당장 전보다 먹거리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산업은행이 거래를 따갈 때마다 경쟁사들의 반발과 잡음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조달금리와 힘의 논리에 기반한 산업은행의 영업 형태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크다.
사실 연초만 해도 산업은행이 자본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낼 것이란 전망은 많지 않았다. 내부에서도 공격적인 증권사나 저금리·무금리성 자금을 쌓아둔 시중은행과의 경쟁이 쉽지 않을 것이란 의견이 있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달랐다. 국가 수준의 신용도를 등에 업은 산업은행의 공세를 오히려 민간 금융사들이 당해내지 못했다. 몇 번 금리 경쟁을 붙었다가도 이내 손을 들고 떠나는 사례가 많았다. 경쟁사들이 재매각(Sell down)을 걱정할 정도였다.
태림포장 M&A에선 인수 자문사인 미래에셋대우가 인수금융 역할까지 맡길 원했지만 산업은행에 밀렸다. 다른 인수후보 쪽 주선사들은 4.2% 내외의 대출금리를 산정했는데, 산업은행은 훨씬 낮은 금리를 써냈다. 그나마 처음 제시한 금액보다 금리를 높였는데도 4%를 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브원 M&A에서도 금리의 힘이 통했다. 어피너티는 거의 모든 거래에서 손을 맞춘 인력이 있는 KB증권과 관계가 돈독했다. KB증권이 아니면 박하디 박한 어피너티의 조건을 맞출 곳이 없을 것이란 평가가 있을 정도였지만 정작 승자는 산업은행이었다. KB증권이 3%대 후반까지 따라갔지만, 무려 3%대 중반을 제시하면서 기선을 제압한 산업은행을 제치긴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규모 PF나 설비 투자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원래 산업은행이 강점을 보였고 민간 금융회사들이 혼자 책임지기 어려운 영역이다. 그러나 애초에 경쟁 기회마저 잡기 어렵다는 점에선 불만이 크다. 예전처럼 발행시장 업무를 확장한다면 국내 증권사들의 먹거리는 더 줄 수밖에 없다.
고객들이 산업은행에 불만을 갖는 경우도 없지 않다.
금리 조건에 혹해 돈을 빌렸다가 리파이낸싱 등 후속 작업 때 엄격한 조건을 제시받고 마음이 떠나기도 했다. 산업은행은 보는 눈이 많은 조직이다보니 민간 금융사처럼 유연하게 움직일 수 없는 한계도 있었다. 산업은행의 힘을 무시하기 어려운 기업들은 다른 선택지를 고르기 쉽지 않았다. 태림포장 인수금융 협상에선 산업은행이 추가 담보를 요구하며 긴장감이 흘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수금융 업계 관계자는 “산업은행은 기업들을 흔들 파워를 가지고 있는 데다 제시하는 금리 역시 알려 줘도 따라가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금리 조건 때문에 손을 잡았다가 서류 작업 과정에서 학을 떼고 다시는 산업은행 돈을 빌리지 않겠다는 글로벌 사모펀드(PEF)도 여럿 있다”고 말했다.
정권마다 역할론 출렁…결국은 정체성 문제
자본시장의 공적(公敵)이 되어가는 산업은행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이동걸 회장은 산업은행이 금융산업의 중요한 일원이며, 은행으로서 경쟁력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돈을 벌어오라 독려하는데 떨어지던 경쟁력이 갑자기 끌어 올려질리 만무하다.
경쟁력을 키운들 직원들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빛을 본 사람들은 다른 자리로 옮겨갈 수 있었던 올드보이나, 산업은행의 전문성이 우위에 있을 때 조직을 떠난 직원들이다. 다른 금융사들이 역량을 끌어올리는 동안 산업은행은 정체했다. 숙련공이 될 수는 있어도 전문가 되기는 어렵다는 자조가 나올 상황이다. 무리한 여신 확대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실적을 독려한다면 가장 간편하고 강력한 방법을 꺼낼 수밖에 없다. 수십년간 쌓아 올린 기업 네트워크와 산금채의 조달금리, 압도적인 물량은 다른 금융사들이 가지지 못한 무기다. 인수금융 업계의 큰 손들이 특히 산업은행을 불편해 하는 이유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모습이 산업은행의 목적에 부합하느냐 하는 것이다. 산업은행은 산업의 개발·육성, 지속가능한 성장 촉진 등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관리하기 위해 설립됐다. 넓게 보면 법이 허락하지 않는 ECM 업무를 제외하면 자본시장에서 어떤 일을 해도 된다. 그러나 달리 보면 민간 영역이 하기 어려운 일을 수행한다는 정책금융기관의 역할과는 동떨어진 것들도 많다.
한 금융회사 인수금융 담당자는 “국가를 등에 업고 저리로 빌린 자금을 대기업의 M&A를 지원하는 데 쓰는 것이 설립 취지에 부합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갈등은 산업은행의 정체성이 확고히 정립되지 않는 한 계속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산업은행의 역할론은 정부마다 다르게 주어졌다. 어떤 때는 민영화를 한다며 조직을 나누고 리테일 영업을 확대했다. 민영화 전략을 폐기한 후엔 다시 조직을 합치고 시장과 충돌 가능성 있는 영역을 줄였다. 그 다음엔 한 술 더 떠 글로벌을 외치다가 다시 국내에서도 경쟁력을 갖추겠다고 한다. 민간과 똑 같은 일을 하는 정책금융기관의 존재 이유에 의문 부호가 붙을 수밖에 없다.
이동걸 회장은 돈을 벌어 혁신성장 재원으로 쓰겠다고 했다. 목표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제도화, 관습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밝힌 대로 돈을 잘 벌어서 좋은 데 쓰는 토대가 만들어지는 과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산업은행의 바람이 온전히 이뤄지는 경험은 많지 않았다. 이 회장이 30년을 보고 3년을 일한다는 말을 종종 했다지만, 당장 1년 남은 임기 후를 장담하기 어려운 처지다. 급작스레 꺼낸 수출입은행과의 통합 화두도 공허해 보인다.
한 정책금융기관 관계자는 “산업은행처럼 은행, 보험, 구조조정 등 영역을 아우르는 정부 은행은 해외에선 찾아보기 어렵고, 경쟁력이 다른 정부 은행이 왜 시중에서 경쟁해야 하는 지도 모호하다”며 “산업은행 한켠에선 구조조정 역할이 부각되느라 정체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없는 지금의 상황을 반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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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9년 09월 30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