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금 여력 줄고 대주주 요건 강화 등 악재
18건이나 남은 IPO 공모 '철회도 못하고 어쩌나'
신한지주 오렌지라이프 편입에도 변수될 듯
HDC 아시아나항공 인수 신주 발행가에도 영향줄 듯
-
9월 이후 낙관으로 치닫던 국내 금융시장에 된서리가 내리고 있다. '내년 코스피 2400', '상고하저(상반기 호황, 하반기 수축) 증시' 등 희망적 전망들이 나오기가 무섭게 잠재돼있던 국내 안팎의 부정적 이슈들이 무섭게 불거지기 시작한 것이다.
안정적인 시장 환경을 예상하고 연말연초 거래를 진행하려던 회사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이다. 당장 연말까지 공모청약을 진행할 예정인 기업공개(IPO)만 18건이다. 신한금융지주의 오렌지라이프 완전자회사 편입, HDC의 아시아나항공 인수 등 굵직한 거래들도 모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20일 코스피지수는 전일 대비 1.3% 떨어진 2125.32으로 거래를 마감했다. '가을 랠리'가 시작하기 직전인 지난 10월2일 이후 처음으로 1% 이상 하락했다. 코스닥 시장은 더 우울했다. 코스닥지수는 전일대비 2% 넘게 하락했다.
수급이 무너졌다. 외국인들은 이날 하루에만 코스피 시장에서 3340억여원을 내다팔았다. 11월 들어 19일까지 13거래일간 순매도 규모인 2578억원보다 많은 물량을 이날 단 하루에만 내던진 것이다. 국내 기관들까지 매도에 가세하며 낙폭을 키웠다. 특히 코스닥 급락은 사실상 국내 기관들의 작품이었다. 연기금을 포함한 모든 거래 주체가 매도세를 취했다.
연기금의 시장 방어능력이 한계에 달했다는 지적이다. 외국인들은 10월 이후 지금까지의 상승장에서도 꾸준히 국내 주식을 매도했다. 지수가 상승한 건 연기금의 집중 매수세에 힘 입은 바가 컸다.
하반기들어 연기금은 코스피 시장에서만 5조5800억여원을 순매수했다. 이 중 대부분이 8~9월에 집중됐다. 11월 들어서는 연기금 순매수가 2790억원으로 확 줄어들었다.
여력이 소진됐다는 분석이다. 지난 6월말 기준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매수 여력은 10조원 안팎으로 추정됐다. 이후 5조원 이상 주식을 매수했고, 지수가 5%가량 상승하며 자산 비중이 5조~6조원가량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연금은 올해 말 18%로 목표한 국내 주식 비중을 내년 말 17.3%로 축소할 예정이라 주식을 더 담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잘 풀릴 것으로 예상됐던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도 다시 악화할 가능성이 대두했다. 미국 상원은 19일(현지시간) 만장일치로 '홍콩인권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미국이 홍콩의 자치수준을 평가해 매년 심사, 홍콩에 부여하고 있는 관세·무역·비자에 대한 특별 혜택을 유지할 지 결정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은 이에 대해 '내정간섭'이라고 반발했다. 그리고 20일 달러위안 기준 환율을 전일 대비 88포인트나 높은 달러당 7.0118위안으로 설정했다. 달러당 7위안 아래로 떨어지며 안정화되는 듯 했던 '환율전쟁'이 다시 펼쳐지려는 모양새다.
예상 시가총액이 1조7100억달러(2000조원)에 달하는 사우디아라비아 국영석유회사 아람코가 사우디 증시에 상장하기로 한 것도 투자심리에 부담을 주는 요소로 꼽힌다. 아람코의 시가총액은 코스피 전체 시가총액(20일 종가 기준 1664조원)보다도 크다.
이런 회사가 모건스탠리인터내셔널자본시장인덱스(MSCI) 이머징마켓에 편입되며, 해외 패시브 자금이 추가로 유출될 전망이다. 이미 지난 5월과 8월, 11월 지수 리밸런싱(재조정) 과정에서 상당량의 해외 자금이 이탈했는데, 추가로 1조원에 가까운 자금이 빠져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한 중견 자산운용사 주식운용본부장은 "지소미아(GSOMIA)·방위비 협상 난항으로 대표되는 미국·일본과의 관계 악화도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라며 "강화된 대주주 기준이 연말 적용돼 세금 부담이 늘어날 것까지 고려하면 올 연말 증시를 낙관할 수만은 없다"고 말했다.
불과 이달 초까지만 해도 증권가엔 낙관론이 우세했다. 미중 무역분쟁이 일단 1차 합의에 이르고, 미국·일본과의 관계도 마찰 끝에 어느정도 복원이 될 것이라는 시선이 많았다. 여기에 디즈니플러스로 대표되는 글로벌 오버더톱(OTT) 서비스 경쟁 심화, 구글 스태디아 서비스로 대표되는 클라우드 게임 산업 확대에 따른 데이터 센터 투자 수요가 반도체 업황을 끌어올려 줄 것이라는 전망이 가세했다.
그러나 이런 전망은 거의 현실화하지 않고 있다. 무역분쟁은 여전히 파열음을 내고 있고, 지소미아는 파기를 염두에 둬야 한다는 전망이 힘을 받고 있다. 서버용 반도체 디램(DRAM) 현물 가격은 20일 기준 전일 대비 마이너스(-) 0.36%, 전달 대비 -5.86% 하락하며 거래 모멘텀 자체가 살아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디즈니플러스는 지난 12일, 구글 스태디아는 19일 서비스를 시작했다.
당장 연말까지 우호적인 시장을 염두에 두고 딜(deal)에 나선 기업들은 긴장하고 있다. 당장 20일 이후 무려 18건의 IPO 공모가 예정돼있다. 예상 공모 규모는 6000억원에 달한다.
최근 증시 활황에 따라 9월 이후 IPO 공모 청약에 나선 기업들은 대부분 흥행에 성공했다. 연말까지는 무난한 장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지난달 증권신고서가 쏟아져 나오는 모습이 관측됐다. 이렇게 연내 상장을 마무리지으려던 기업들이 급작스레 암초를 만난 것이다.
한 증권사 기업공개 담당자는 "신고서를 제출했으니 일단 일정에 변동없이 진행은 해야겠지만 유통시장(증시) 동향이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라며 "수요예측일 전후라도 증시가 안정된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한금융지주가 내년 초를 목표로 진행하고 있는 오렌지라이프 완전자회사 전환에도 불안한 증시가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현재 오렌지라이프는 주식매수청구권 행사가격을 2만8235원으로 제시했다.
주식매수청구권 행사를 위한 오렌지라이프 주주들의 반대의사 통지접수기간은 내년 1월9일까지다. 만약 올해 말에서 내년 초까지 오렌지라이프 주가가 2만원대 초반으로 급락한다면, 주주 입장에서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지 않을 이유가 사라진다.
1월 중 반대의사를 통지하고 주주총회 이후 권리를 행사하면 오렌지라이프의 연간 배당을 모두 받고, 시가보다 높은 가격에 주식까지 매각할 수 있다. 오렌지라이프는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규모가 5000억원을 넘으면 주식교환을 철회할 수 있다.
신주발행 기준가를 시장 가격에 맞춰 산정해야 하는 아시아나항공 매각(M&A)에도 일부 변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최종 매각·인수 합의 이후 이사회 개최일을 기준으로 신주 발행 가격을 산정하게 되는데, 주가에 따라 HDC현대산업개발이 확보할 수 있는 주식의 수가 달라지는 까닭이다. 특히 주가가 액면가인 5000원 이하로 떨어진다면, 신주를 액면가로 발행할지 액면미만 발행을 위해 주주총회 특별결의를 거칠지 셈법이 더욱 복잡해질 전망이다.
다른 자산운용사 중견 운용역은 "미국은 이달 초까지 탐욕&공포 지수가 88점(100점 만점)에 이르는 '극단적 탐욕' 상황이었고 국내 증시도 마찬가지였다"며 "연말까지 조정은 불가피할 것 같고, 대외 변수와 변동성까지 고려하면 '상고하저'의 '상고' 전망도 수정할 필요성이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9년 11월 21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