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10월25일 공판에서 재판부는 이재용 부회장에게 "미국 연방법원 양형기준 제8장에 따른 준법감시제도를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지난달 6일 재판에서는 "정치권력자로부터 (뇌물을 달라는) 요구를 받더라도 응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변을 다음 재판 기일 전까지 제시해 달라"고 요청했다. 삼성은 바로 그룹 차원의 준법감시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다.
위원장을 맡은 김지형 전 대법관(현 법무법인 지평 대표변호사)은 "삼성의 준법·윤리 경영에 대한 파수꾼·통제자·감시자가 되겠다"며 "법 위반 사안을 인지하면 이에 관한 조사를 시행하고 법 위반 사항은 시정과 제재, 재발 방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안에 따라서는 형사 고발 조치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에 말을 빌리자면 준법감시위가 주요 계열사 경영 활동에 미칠 영향은 작지 않아 보인다.
'새로운 기업문화가 마련될 것이다', '이재용 부회장 봐주기다' 갑론을박은 계속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 양형과 관련된 사법적 판단은 차치하고 시장 관점에서 보자. 과연 이사회를 제쳐두고 외부에 독립적인 외부 감시기구를 둔 삼성전자 등 그룹 계열사들을 정상기업이라고 볼 수 있을까.
재판부가 언급한 미국 연방 양형기준 제8장은 기업에 적용되는 기준이다. 기업은 언제나 위법행위를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고자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는데, 위법 행위를 억제할 내부 통제장치를 만들어 기업 스스로 범죄 행위를 방지하고 감지하며 보고하는 내부 시스템을 만들도록 유도하겠다는 의도다.
국정농단 관련 뇌물공여,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가 기업의 이윤 극대화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보긴 어렵다. 한국적 정서에 입각해 안정적인 경영권 확보라는 ‘큰 그림’에서 보자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정확히는 이재용 부회장, 개인의 승계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들이다.
준법감시위 설립의 절차적 정당성도 문제다. 과정을 보면 '재판부의 주문→이재용 부회장의 수용→준법감시위 설립 결정→삼성전자 경영진 준법서약식→이달 중 삼성전자 등 7개 계열사 이사회 승인 추진→2월 준법감시위 출범'이다. 계열사들이 개최할 이사회는 결정 사안에 사인만 하면 되는, 말 그대로 요식 행위가 됐다.
'글로벌 스탠더드' 관점에서 보자면 기업과 주주에 해악을 끼친 경영진은 물러나는 것이 정상이다. 법적 문제가 있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개인의 문제를 기업에 전가하고 이를 기업이 책임져야 하는 이상한 모양새가 됐다. 준법감시위라는 해외에서도 찾기 힘든 기구는 미래전략실의 사례처럼 법적 실체가 없다. 삼성전자, 삼성SDI, 삼성전기, 삼성SDS, 삼성물산, 삼성생명, 삼성화재 등 상장 계열사들은 법적 실체가 없는 기구의 감시를 받아야 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에 직면했다. 이들 계열사는 이런 기구가 없이는 스스로 법을 지킬 수 없다고 투자자들에게 선언한 셈이다. 기업 신뢰도 하락의 피해는 고스란히 주주들의 몫이다.
외국계은행(IB) 관계자는 "삼성전자의 외국인 주주 비율은 60%에 육박하고, 삼성물산은 제일모직과의 합병 과정에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의 공격을 받은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며 "실제로 준법감시위 설치로 이재용 부회장이 양형을 받는다면 삼성전자의 경영 안정성이란 효과를 떠나 한국 경제 및 사법 시스템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도 저하는 불가피해 보인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삼성그룹 오너 일가의 준법 약속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3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글로벌 경기 침체 시기를 돌파할 경영 시스템의 혁신 방안으로 신경영을 선언하면서 제시한 '지행33훈'에 도덕성 회복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삼성헌법'을 명시했다. 2011년에는 '무관용 준법 경영'을 선포했다. 이번 준법감시위 설립은 세번째 준법 경영 약속이다.
다시 말해 삼성은 세번째 사후약방문 카드를 꺼낸 셈이고, 그만큼 오너 일가의 준법 의지가 약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일각에선 준법감시위를 감시할 또 다른 감시위를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웃지 못할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시장의 관점에서 기업의 준법 경영은 정상적인 이사회 구성에서부터 시작된다. 외부 독립 감시기구가 아닌, 이사회 스스로가 준법 경영의 파수꾼·통제자·감시자가 돼야 한다는 얘기다.
▲이사회가 경영진을 견제할 수 있는 지배구조 구축 ▲이사회의 투명성·안정성·독립성 확보 ▲사외이사·감사기구의 독립성·전문성 강화 ▲소수 주주권 강화 ▲비상장사까지 이사회 중심 투명 경영 확대 등등 이제는 상식이 된, 하지만 아직 현실화했다고 얘기하긴 어려운 사안들이다. 더 이상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과연 이재용 부회장과 경영진들이 계열사들의 정상적인 이사회 구성을 염두에 두긴 했는지 묻고 싶다. 단숨에 어떤 결과를 원하는, 너무 쉬운 길을 선택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재계에선 흔히 "삼성이 하면 우리도 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삼성의 존재감이 크다는 얘기일테다. 그래서인지 준법감시위 같은 독립 감시기구가 재계 트렌드라 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왕이면 삼성이 선진화한 이사회 구성에 앞장서고 이것이 재계 트렌드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0년 01월 23일 07:00 게재]
입력 2020.01.30 07:00|수정 2020.01.31 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