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F 사상 첫 대형 매크로에 충격
회수 성과 따라 실력 차 벌어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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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발 경제 위기로 사모펀드(PEF)들도 투자에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실물 경제까지 타격을 입는 상황에선 기업을 싸게 거둬들여 차익을 올리는 과거 위기 때의 전략이 유효할 것인지도 고민거리다. 기관투자가들도 공격적인 투자엔 부담을 느끼고 있다.
운용사들은 투자보다 포트폴리오 관리와 회수 전략을 수정하는 것이 급하지만 불확실성이 걷히기 전엔 답을 찾기 쉽지 않다. 시장 상황을 살피며 장기간 버티기에 나서야 할 가능성이 크다. 이 과정에서 운용사들의 역량에 따라 희비가 갈릴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PEF들은 경제 호황과 침체 속에서 수익률이 널을 뛰었다. 2000년대 중반 경기가 호황일 때 꾸려진 PEF들은 글로벌 금융위기 후 직격탄을 맞았다. 반면 경기가 좋지 않거나 기업의 위기를 틈탈 때는 수익률이 쏠쏠했다. 론스타(외환은행), 어피너티(하이마트, 오비맥주) 등 외국계 PEF들도 이때 성과가 좋았다.
코로나 사태로 상장사들은 주식 가치가 떨어졌고, 대부분 기업들이 실적 악화를 피하기 어렵다. 지난 수년간 높은 가치평가에 부담을 느꼈던 PEF들에겐 염가에 기업을 인수할 기회일 수 있다. 지금 씨앗을 뿌려두면 2020 빈티지(Vintage)가 두고두고 성공 사례가 될 것이란 장밋빛 전망도 나온다.
그러나 기업이 ‘진짜로 싼 것이냐’는 물음엔 고개를 젓는 관계자들이 적지 않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달리 코로나 사태는 모든 영역에서의 생산과 소비를 위축시키는 ‘실물경제 위기’로 번지는 양상이다. 사태가 장기화하면 전세계 수출 공급망이 무너지고 기업들의 영업 네트워크가 망가질 가능성이 크다. 기업가치 회복이 지연되거나 아예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잠재적으로 매각 의사가 있는 곳들도 쉽게 움직이기 어렵다. 거래 협의도 어렵거니와 이미 1분기 실적이 망가진 터라 제 값을 받기 쉽지 않다. 국내 PEF의 투자처는 90%가 국내인데 주요 거래 발굴처인 대기업들도 중대한 의사 결정을 멈췄다. 올해도 선제적 대응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지만 정부가 대기업까지 적극 지원하겠다는데 무리하게 매각에 나서 부정적 신호를 줄 이유가 없다. LG그룹만 해도 LG화학 배터리 사업 분사가 중단됐고 PEF 발걸음이 끊겼다.
경쟁 강도가 약화한 것도 아니다. 매물이 뜸하니 알음알음 진행되는 거래에서도 PEF들이 각축을 벌였다. 한국콜마 제약사업 M&A도 유수의 운용사들이 저마다 승리를 자신했으나 가장 덩치가 큰 IMM PE가 마지막에 웃었다. 세컨더리 거래 역시 최근 사례가 늘고는 있지만 서로의 사정을 뻔히 아는 상황에선 눈치 싸움이 불가피하다.
한 대형 PEF 운용사 대표는 “주가는 빠졌지만 PEF에 쌓아둔 유동성이 많다 보니 거래 밸류는 낮아지지 않고 있다”며 “항공(이스타항공), 여행(하나투어)처럼 눈에 위기가 보이는 곳들은 가격을 깎았지만 그렇지 않은 곳들은 차라리 팔지 않겠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기관출자자(LP)들은 지금이 자금을 뿌리기에 나쁘지 않다고 보지만 운용사들이 적극 투자를 집행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 코로나 사태의 상흔이 파악되고 매각자들의 눈높이도 낮아져야 염가 매수가 가능할 것이란 지적이다. 운용사들도 주식, 채권 등 전통 투자 영역에서 손실이 큰 LP들이 대체투자에서도 보수적으로 움직일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프로젝트펀드 결성은 당분간 어렵다는 시선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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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용사들은 투자보다 포트폴리오 기업을 관리하는 것이 급하다. 타격을 줄이고 예상 수익률을 조정하느라 분주하지만 언제 시장이 안정을 찾을지 불안감이 크다. 투자든 회수든 불확실성이 걷힌 후에야 기회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그 때까지 버티는 것이 중요해졌다.
다른 대형 운용사 대표는 “지금은 누가 됐든 생존을 생각해야 하고 견뎌낼 능력이 있느냐가 중요하다”며 “관리 보수도 결국은 줄어들기 때문에 점점 회수 압박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대규모 자산을 깔아두고 관리 보수도 넉넉한 대형 운용사는 그래도 사정이 낫다. 투자나 회수를 미뤄도 당장 살림 걱정은 덜 수 있다. 그러나 중소형 운용사들은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운용비가 적게 든다 해도 원래 보수 자체가 많지 않다. 대형사 대비 담고 있는 자산들의 부실 위험도 크다. 무탈히 위기를 넘긴다 해도 코로나 사태로 인해 ‘성장 사다리’를 잡기는 더 어려워질 것이란 평가도 나온다. 신생 운용사들이 관리 보수로 손익분기점(BEP)에 도달하는 시점이 늦춰질 수밖에 없다.
코로나 사태는 궁극적으론 PEF 운용사들의 재평가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PEF는 제도 도입 초기 위기들도 있었지만 본격 성장궤도에 오른 후엔 큰 충격파를 맞지 않고 성장했다. PEF 시장에 풀리는 자금이 매년 늘었고, 주식 시장도 안정적이라 회수 부담도 크지 않았다. 코로나 사태가 PEF가 사실상 처음 맞는 대형 매크로 악재다.
한 1세대 PEF 운용사 대표는 “글로벌 금융위기 후 특별한 충격이 없었지만 이번에 사실상 첫 대형 매크로 이벤트를 맞게 됐다”며 “지금까지는 일찍 쌓은 이름값에 유동성이 더해지며 덩치 큰 곳이 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부터는 회수 성과에 따라 진정한 실력 차이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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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0년 03월 31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