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은 원인이 아니었다. 결과였다. 2007년 여름부터 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채권이 부실화하기 시작했다. 2008년 초, 공포가 커지며 글로벌 증시가 급락했다. 국내 증시도 마찰적 조정을 겪었다. 2100선에 다가서던 코스피 지수가 500포인트 넘게 하락하며 1500선까지 밀렸다.
날이 따뜻해지며 낙관론이 득세했다. 2008년 3월 17일을 저점으로 코스피는 전형적인 'V자 반등' 그래프를 그렸다.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은 이미 투자자들의 머리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2007년 두 차례의 마찰적 조정을 겪으며 이미 극복한 이슈라고 생각했다. 미국 증시도 마찬가지였다. 2007년의 폭등장이 다시 연출되는 분위기였다.
-
"4월부터 코스피 상승 속도 가속화" (2008년 3월 20일)
코스피, 2분기 1620~2000포인트 가능, '공격적 매수' (2008년 3월 24일)
"바닥 찍고...올해 2000 내년 3000 간다" (2008년 4월 2일)
美 훈풍에 코스닥도 '맑음' (2008년 4월 17일)
개인 직접투자 늘고있다 … 고객예탁금 올 최대 (2008년 4월 30일)
이 시기 증권사 리서치센터와 주요 일간지ㆍ경제지들은 연일 장밋빛 전망을 쏟아냈다. 움츠러있던 개인투자자들이 증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2007년 말 마찰적 조정 장세에서 8조원대까지 뚝 떨어졌던 개인 투자자 예탁금이 2008년 4월 12조원으로 50% 늘어났다. 증권사 객장은 보험을 깨고 적금을 깨고 쌈짓돈을 털어 찾아오는 고객들로 붐볐다.
쏟아져들어온 돈의 힘이 증시를 밀어올렸다. 돌이켜보면 '패닉 바이'(panic buy;비이성적 매수), '포모 바이'(FOMO buy;소외되기 싫어 하는 매수)에 가까웠지만, 당시엔 '유동성 장세', '체력이 좋아진 한국 증시'라고 불렸다.
낙관적인 전망이 지배하는 가운데 국내 증시는 정확히 두 달 동안 랠리를 거듭했다. 코스피 지수는 상승을 거듭해 1900선 회복을 눈 앞에 뒀다. 3월 중순 공포를 이겨내고 삼성전자를 매수한 투자자라면 5월 중순 50% 안팎의 수익률을 거둘 수 있었다. 글로벌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찾아오는 상황)에 대한 우려는 허황된 소리로 치부됐다.
모두가 흥에 취한 5월 중순,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의 여파가 수면 아래서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외국인 자금이 먼저 움직였다. 5월부터 국내 선물을 대량 팔아치우기 시작한 외국인 투자자들은 6월부터는 현물을 던지기 시작했다. 2008년 6월 초부터 2008년 10월 말 저점까지 외국인들은 코스피에서만 20조원을 팔아치웠다.
2008년 7월, 리먼브러더스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자금 이탈 속도가 빨라졌다. 7월 중순에는 코스피지수가 3월 전 저점 수준인 1500대 초반까지 다시 밀렸다. 이 상황에서도 주요 증권사 리서치센터는 '1500~1700 박스권 장세', '단기 조정 후 재상승'을 외쳤다. 하락에 베팅한 투기세력은 후퇴하고 있으며, 글로벌 증시가 다시 불을 뿜을 거라는 낙관론이 팽배했다.
2008년 9월 15일. 리먼브러더스가 파산 신청을 했다는 속보가 날아들었다. 리먼의 파산은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이 이미 막을 수 없는 금융위기로 비화했음을 방증하는 결과물이자 시작점이었다. 금융경색이 시작되며 증시는 재차 거꾸러졌다. 2008년 10월 27일엔 장중 한때 코스피 900선이 무너지기도 했다.
개미들, 올해 100조원 날렸다 (2008년 10월 7일)
돈빌려 주식투자 개인들 폭락장에 신용불량 급증 (2008년 10월 10일)
'깡통계좌' 속출…펀드 손실은 55조 (2008년 10월 12일)
"저는 바보같은 증권회사 직원입니다" (2008년 10월 25일)
'주식투자 실패' 30대 또 자살 (2008년 11월 2일)
2008년 가을엔 절망과 공포가 가득했다. 불과 6개월 전 증시를 지배하던 탐욕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고통은 2009년까지 계속됐다. 코스피지수가 1500선을 회복한 건 정확히 1년 뒤인 2009년 7월 중순이었다. 전 재산을, 혹은 빚까지 져가며 증시에 달려들었던 일부 개인들이 견뎌내기에 1년은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다. 2009년 말까지 개인과 기업의 파산신청이 이어졌다.
지금은 어떨까. 한 증권사 관계자는 3월 국내 증시를 지켜보며 "모두 다 눈에 불을 켜고 어떻게 하면 삼성전자를 싸게 살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주식으로 돈을 벌 수 있을지 혈안이 되어 있다"며 "이건 공포의 장세가 아니라 탐욕의 장세"라고 말했다.
증시의 분위기만 보면 지금은 2008년 가을보다는 2008년 봄과 비슷한 게 사실이다.
물론 모두가 다 '이번엔 다르다'라고 말한다. 투자 시점을 엿보고 있는 증권사 예탁금 규모는 44조원으로 역대 최고치다. 역시 사상 최대인 10조원 규모 증권시장안정펀드도 시장 지킴이로 활동할 준비를 끝냈다. 하나금융투자 리서치센터는 '동학개미운동'으로 일컬어지는 국내 개인투자자들의 매수 행렬을 '한국 자본시장의 역사적 분수령'이라며 '개인의 승리'를 선언했다.
아이러니한 사실이 있다. 지난해 이맘 때에도 자본시장엔 '이번엔 다르다'는 논리가 득세했었다. 당시 미국의 장단리 금리 역전 현상을 두고 '이번에만큼은 금리 역전이 경기침체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가 힘을 얻은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뒤인 지금, 글로벌 경제는 대공황 이후 처음 맞이하는 대형 침체를 눈 앞에 두고 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코로나19 팬데믹(전 세계적 유행병)을 핑계댈 수도 있다. 코로나19는 분명히 '블랙스완'(극단적인 예외)다. 그러나 코로나19는 단순히 방아쇠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도 많다. 이미 자본시장은 중앙은행이 빌려주는 1일 만기 레포(Repo;초단기 채권) 자금을 증시에 투자할만큼 타락해있었다.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공급망)이 전에 없이 긴밀히 연결된 상황에서, 일부 초대형국의 자국 우선주의와 무역 보호주의가 국제 공조를 통한 글로벌 성장에 흠집을 내고 있었다. 터질 게 터졌다는 말이다.
코로나19 팬데믹과 마주한 세계 경제는 야구로 비유하면 이제 1회초 투아웃 정도로 설명된다. 실물 경기 침체가 이제 막 시작됐다는 평가다.
3월 마지막주 328만건이었던 미국 주간 실업급여 신청 건수가 4월 첫주엔 400만건을 돌파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실물 경기를 반영하는 국제 유가와 구리 가격은 모두 10년래 최저 수준에서 헤매고 있다. 신흥국 자본이탈도 시작됐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화폐인 란드화의 달러 대비 가치는 최근 14년만에 최저 수준으로 추락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신흥 채권왕'으로 불리는 제프리 건드라크 더블라인캐피털 최고투자책임자(CIO)는 현지시간으로 3월31일 "S&P500 지수가 4월 중 3월의 저점을 뚫고 내려가 다시 패닉에 빠진 느낌을 받을 것 같다"고 경고했다. 같은 날 골드만삭스도 뉴욕 증시에 대한 단기 투자의견을 '비중축소', 12개월 투자의견을 '중립'으로 제시하고 "현금성 자산을 확대하라"고 권유했다.
-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0년 04월 02일 07:00 게재]
입력 2020.04.06 07:00|수정 2020.04.07 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