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 시끄러웠는지도 모르게 조용하다. 지난 1월 윤종원 IBK기업은행장 취임 이후 반 년, 은행 안에서는 행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쏙 들어갔다. '정권 실세 행장'이 노동조합과의 약속까지 잘 지키고 있는 것에 대해 만족스럽다는 목소리까지 들린다.
반면 소액주주들은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실적이 꺾인 건 모든 은행이 다 마찬가지지만, 기업은행은 눈 높이가 낮아진 컨센서스마저 하회하는 실적을 내고 있다. 정부의 '증자 폭탄'으로 주주 가치도 매달 희석되고 있다. 현재가보다 낮은 목표주가를 제시하는, 사실상 매도 의견의 레포트가 나올 정도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역할이 중요한 코로나 국면에 기업은행이 '팔로워'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누구나 다 하고 있는 '혁신금융' 간판만으로는 윤 행장의 리더십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코로나 이슈로 더 확연하게 드러난, '상장 국책은행'이라는 모순된 지위에 대한 해법도 필요하다는 평가다. 아직은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기업은행은 지난 7월말 대규모 조직개편, 승진 인사와 함께 성과평가제도(KPI)를 전면 개편했다. 혁신금융그룹, 자산관리그룹을 신설하고, 기존에 30개였던 KPI 지표도 14개로 간소화했다. 은행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혁신경영 전략'의 실행을 위해서라는 설명이 뒤따라 붙었다.
'혁신'으로 포장하긴 했지만, KPI 간소화는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윤 행장은 출근 저지투쟁을 벌이던 노조와 1월28일 공동선언문을 발표하며 '비이자수익 KPI 개선방안'을 약속했다. 지난 4월에는 ▲일반예금 ▲적립식 예금 ▲개인교차판매 ▲자산관리고객수 ▲제안영업 ▲기업교차판매 등 노조가 제시한 6개 항목을 KPI에서 제거하는 데 합의했다.
대신 혁신경영 관련 지표를 강화했다는 게 기업은행의 설명이다. 이는 은행권의 트렌드로,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정부는 창업ㆍ벤처금융에 막대한 자금을 퍼붓고 있다. 대형 시중은행들도 이미 발맞춰 뛰고 있다. 오히려 기업은행이 좀 늦은 게 아니냐는 시각도 없지 않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코로나를 핑계로 은행의 기본적인 업무마저 성과지표에서 제외하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며 "직원들은 행복할수도 있겠지만, 정부를 제외한 주주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라고 평가했다.
기업은행이 '실세 행장'의 덕을 봤다는 시각도 있다. 지난 3월 처음 진행된 소상공인 긴급 대출 땐 기업은행에 대부분의 고객이 몰리며 창구가 마비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5월 진행된 2차 긴급 대출땐 6개 시중은행이 이를 분담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윤 행장이 상당부분 개입했을 거란 게 금융권의 시각이다.
저신용자 긴급 대출을 담당한 소상공인진흥공단의 미처리 업무를 기업은행이 떠안지 않은 것 역시 윤 행장의 공로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지난달부터 여당에서 슬그머니 흘러나오던 '기업은행 중소기업벤처부 산하 이관설' 역시 어느 순간 쏙 들어갔다.
기업은행 노조 입장에서 보면, KPI의 독소조항이 사라지고 정책 집행의 부담과 소모적인 정치적 논란은 줄어든 셈이다.
그랬던 윤 행장이 받아든 첫 반기 성적표는 참담한 상황이다. 전년동기 대비 영업이익은 19.6%, 당기순이익은 17.6% 급락했다. 지난해 2분기 1.89%던 순이자마진(NIM)은 사상 최저 수준인 1.60%까지 내려왔다. 자기자본이익률(ROE)이나 총자산이익률(ROA) 역시 국내 은행 중 제주은행을 제외하면 최하위에 가깝다.
-
무엇보다도 시장이 실망했던 부분은, 2분기 기준 눈높이가 상당히 낮아졌던 컨센서스보다도 10% 가까이 저조한 이익을 냈다는 점이다. 다른 은행 및 은행지주들은 예상보다 좋은 실적을 내며 실적 발표 전후로 단기 주가 회복이 이뤄졌다. 반면 기업은행 주가는 실적 발표 이후에도 계속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일부 증권사에서는 '보유'(HOLD) 의견에 목표 주가를 현 주가보다 낮게 제시하며 사실상 '매도' 사인을 내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정부가 소상공인 지원 자금을 제3자배정 방식 유상증자로 지원하며 주주 가치는 하루가 다르게 희석되고 있다. 상반기에만 4차례에 걸쳐 1조2700억원이 증자됐고, 주식 수는 28.1% 늘어났다. 2018년 3000원에 육박했던 주당 순이익은 순이익 감소에 주식수 증가가 겹쳐져 올해 2000~2100원에 머물 전망이다.
투자업계에서는 윤 행장이 '실세 행장'이라면 정부의 자금 지원 방식을 제3자배정이 아닌, 출연 방식으로 협의했어야 하지 않았겠느냐는 아쉬운 목소리가 나온다. 정부가 최대주주인 상장사라는 특수한 지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
최근까지 기업은행은 이 모순을 '일반주주-정부 차등 배당'정도로 비켜가고 있었다. 사실 이전까지 정책자금이 대부분 제3자배정 증자로 지원된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은행업을 잘 아는 이였다면 10여년만의 대규모 정책자금 지원인만큼, 주주가치를 감안해 출연 쪽으로 논의를 진행했을 거란 지적도 있다. 일부 투자 커뮤니티의 주주 게시판에도 개인투자자들의 윤 행장에 대한 성토가 이어지고 있다.
한 은행 관계자는 "윤 행장이 금융정책을 담당했던 경제 전문가로서 은행업을 잘 안다는 평가가 있긴 하지만, 용어 자체를 생소해해서 행장 보고시간이 상당히 늘어난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기업은행 관계자는 "(행장이) 은행의 내재가치를 끌어올리라는 주문과 함께 수익성, 주가 등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며 "실적 부분은 코로나 영향을 배제할 수 없고, 충당금을 쌓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고 해명했다.
일각에서는 연말께 일단 가라앉았던 노조와의 갈등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온다. 임기 3년 중 성과의 핵심이 되어야 할 2년차가 갈등과 함께 그냥 흘러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더해진다.
윤 행장이 약속한대로 '노조 추천 이사'가 이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지 여부가 쟁점이다. 윤 행장은 2월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노조 추천 이사에 대해 "명망있는 분이라면 적극 협조할 생각이 있다"고 발언했다. 시각에 따라 언제든 노조와 다시 엇나갈 수 있는 부분으로 해석된다.
윤 행장이 약속한 희망퇴직 제도 역시 다른 340여개 공공기관과의 형평성 이슈가 핵심이다. 윤 행장 혼자만의 힘으로는 해결이 쉽지 않다.
일각에서 '출근을 위한 백기투항'이라는 혹평까지 나왔던 '노사 공동 선언문'으로 인해 경영에 발목이 잡힌다면 윤 행장의 커리어에도 오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미증유의 전염병은 기업은행의 핵심 고객인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을 생사의 갈림길로 내몰고 있다. 윤 행장이 위기에서 리더십을 발휘한 '뱅커'가 될지, 수많은 정권 '낙하산' 중 하나로 사라질 지는 결국 윤 행장의 몫이다.
-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0년 08월 06일 07:00 게재]
입력 2020.08.07 07:00|수정 2020.08.11 08: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