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사·주관사 행보 '조심스럽다' 평 나오지만
SK바이오팜 이후 기관 자금쏠림·청약 광풍까지
흥행 '착시효과' 속 거품은 이미 반영됐단 분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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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시장이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지만 공모가가 희망가격 상단을 초과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투자 열기에도 불구하고 발행사나 주관사 모두 공모가를 높여 잡거나 공모물량을 늘리는 데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SK바이오팜을 비롯해 카카오게임즈나 빅히트엔터테인먼트 등 대어(大漁)도 공모가는 밴드 상단에 가둬두는 모양새다.
지난 2019년 상반기만 해도 너나 할 것 없이 밴드 상단을 훨씬 뛰어넘는 가격으로 공모가를 확정했던 것과는 정 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금융권에선 공모시장에 쏠린 증시자금으로 인한 착시현상을 배경으로 꼽는다. 유동성에 기댄 거품이 공모희망가 밴드에 이미 반영됐을 거란 분석이다. 공모시장을 찾는 자금이 대폭 증가하며 흥행이 쉬워진 만큼, 공모가를 지나치게 높여 잡기엔 눈치가 보일 수 있다는 이야기 역시 나온다. 동시에 겉보기엔 특수를 누리는 것 같아도 뚜껑을 열어보면 공모시장이 변질되고 있다는 푸념도 나온다.
빅히트엔터테인먼트는 지난 28일 기관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수요예측 결과 공모가격을 희망공모가 상단인 13만5000원으로 최종 확정했다고 밝혔다. 수요예측에는 총 1420곳에 달하는 기관투자자가 참여해 1117.25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흥행 측면에서 성공적이란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공모가는 물론 공모물량을 당초 계획보다 상향조정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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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사나 주관사 모두 시장 상황에 비춰 유달리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공모가격은 대표주관회사와 발행사가 수요예측 결과와 증시 상황 등을 고려해 최종 결정한다. 공모가를 높일 수록 발행사는 조달총액이 늘어나고 주관사는 수수료를 많이 받을 수 있는 구조다. 과거엔 수요예측에서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기관투자자가 많고 경쟁률이 치열할 경우 공모가를 높이고 발행물량을 늘리는 경우가 많았다.
올해 누적 청약증거금은 200조원을 앞두고 있다. 지난해 두 배 수준이다. 연간 기준 공모주 투자수익률은 지난 2년에 비해 6배에 달한다. 그러나 희망공모가 밴드 상단을 초과해 공모가격을 결정한 발행사는 총 7곳에 불과하다. 2년 전인 2018년에 비해 30%(25곳)가량 줄어든 수치다. 신라젠 임상중단 쇼크로 특례상장에 나섰던 코스닥 기업이 줄줄이 밴드 하단을 밑돌았던 작년에도 상단을 넘긴 사례는 10건에 달했다.
2018년에는 올릭스·아이큐어·링크제네시스 등 코스닥 상장사가 밴드 상단 대비 20% 이상 높게 공모가를 확정한 바 있다. 당시 수요예측 경쟁률은 600~700대1 수준이었다. 올해 상장에 나선 44개 발행사 중 절반 이상인 23개사의 수요예측 경쟁률이 1000대1을 돌파했지만 7개 발행사가 10% 이내 수준에서 상향조정했다.
증권사 기업공개(IPO) 담당 한 관계자는 "당국 차원에서 신고서 불허 등 간접적 방식으로 개입할 수는 있지만 그럴 만한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라며 "결국 주관사나 발행사가 공모가를 올려 잡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공모가를 높여 잡는 사례가 줄어든 원인을 SK바이오팜 이후 급속도로 변화한 공모시장 분위기에서 찾는 목소리도 있다.
SK바이오팜은 기관 수요예측에서 역사적 경쟁률을 갱신했음에도 밴드 상단에서 공모가격을 확정했다. SK루브리컨츠 당시의 악몽 등을 고려해 최대한 보수적 자세를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결과적으로 SK바이오팜 측의 바람대로 국민주 반열에 올랐다. 여기에 저금리 기조 및 정부 부동산 규제정책을 피해 증시를 찾는 일반투자자 자금이 '따상(시초가가 공모가 두 배에서 출발해 다시 상한가를 기록하는 것)' 신화로 이어졌다.
이후 일반투자자는 물론 기관투자자까지 공모시장을 대하는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자산운용사 한 관계자는 "수익률 바닥이라던 코스닥벤처펀드가 최근 3개월 수익률 50%를 넘기는 등 무조건 들어가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라며 "장외시장에서 밴드 상단 세배에 달하는 가치가 형성되기도 하니 단기적으로 무조건 먹는 게임이라는 판단에 부담 없이 상단 가격을 내는 경우도 늘어났다"라고 설명했다.
유동성 환경이 만들어낸 흥행 착시현상인 만큼 발행사나 주관사가 욕심을 내기에는 시장의 눈치가 보였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과거에 비해 수요예측 경쟁률이나 수익률이 높기는 하지만, 증시 문을 두드리는 발행사의 기업가치가 그만큼 올라간 것이 아닌 이상 무작정 상향조정하기에는 부담이 따른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밴드 상단을 제시하는 기관투자자가 늘어났음에도 '단타대회'에 비유될 만큼 의무보유확약 물량은 단기화하고 있다.
공모희망가액에 이미 거품이 반영되고 있었을 거란 지적도 나온다. 유동성이 뒷받침하는 한 공모희망가격을 높이는 등 기업가치 고평가에 따른 부담이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다. 카카오게임즈나 빅히트엔터테인먼트의 경우 유사회사 선정 과정에서 매출액 격차가 크거나 사업성격이 동떨어졌다는 지적을 받은 바 있다.
빅히트 이후 공모주 광풍이 한풀 꺾일 거란 전망도 고개를 들고 있다. 유동성 환경에 기대 발행사와 주관사, 투자자까지 모두가 특수를 누리는 상황이 계속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증권사 한 관계자는 "카카오게임즈가 단기간 내에 본질가치 몇 배 수준으로 튀어올랐다가 가라앉는 모습을 보인 게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수요예측에도 일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라며 "카카오게임즈나 빅히트가 상단 이상 욕심을 내지 않은 것도 상장 이후 단기적 급등락 가능성을 고려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기관투자자는 일반투자자에 비해 정보력이 높은 만큼 공모희망가격의 적정성을 검증하는 역할을 겸해왔는데 최근 공모시장은 그런 역할을 기대하기 힘든 분위기였다"라며 "훈풍이 잦아들면서 오히려 시장 참여자별 순기능이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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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0년 10월 04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