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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 증권가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을 한 사람만 꼽으라면, 열에 일곱은 정영채 NH투자증권 대표를 첫 손에 올릴 것이다. 우리투자증권(현 NH투자증권) IB사업부를 맡아 회사를 최고의 기업금융(IB) 하우스로 만들었고, 대표이사가 된 후엔 고객 중심 평가지표(KPI) 개편에 앞장서며 업계에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업계인 중 최고'로 꼽히는 정 대표의 이름이 이번 국정감사를 통해 더 널리 알려졌다. 좋은 일로는 아니었다. 정ㆍ관계 게이트로 비화하고 있는 옵티머스자산운용 사태의 핵심 관계자가 된 것이다. 국감장의 국회의원들은 정 대표를 사실상 공범 취급했다. 파생결합펀드(DLF)ㆍ라임자산운용 사태를 거치며 한껏 예민해진 민심이 한 몫 거들었다.
국감 및 공식자료 등을 통해 확인된 사실 관계는 이렇다.
지난해 4월, 옵티머스운용 고문을 맡고 있던 김진훈 전 군인공제회 이사장이 정 대표에게 전화를 했다. 두 사람은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AMP) 동기였다. 통화 후 정 대표는 상품 담당 실무자에게 '접촉해 보라'는 메모를 남겼다.
4월25일, NH투자증권 본사에 김재현 옵티머스 대표가 방문해 상품을 설명했다. 판매에 대한 검토가 시작됐다. 6월11일, 김 대표가 한 차례 더 방문해 NH투자증권 실무자를 대상으로 질의응답을 가졌다. 같은 달 13일, 일반승인이 났고 펀드가 설정됐다. NH투자증권은 17일 옵티머스 사무실을 실사한 후 상품승인소위원회에 이를 회부했다.
상품승인소위원회는 부장급 핵심 실무자들의 협의체다. 본격 판매를 위해선 소위원회 승인이 필요하다. 18일 소위원회 승인이 났고, 19일부터 옵티머스 펀드 판매가 시작됐다. 같은 달 26일, 정 대표는 김진훈 전 이사장과 점심 약속으로 만났다. 이 자리에 예정에 없이 김재현 대표가 동석했다. 식사 장소는 NH투자증권이 한시적으로 운영한 공개 구조 팝업스토어인 '제철식당'이었다.
정영채 대표는 지금까지 일관되게 "펀드 판매 결정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고객 자산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해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고 있지만, NH투자증권 역시 옵티머스 사기의 피해자이며 자신이 상품 승인과 판매에 압력을 행사한 적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정 대표의 해명은 자못 상식적이다.
연간 순이익이 수천억원대인 NH투자증권이 17억원의 판매수수료를 위해 사기에 동참한다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 옵티머스의 로비로 정 대표가 움직였다기엔 시간 순서가 맞지 않다. 옵티머스 펀드 승인 절차에서도 절차상 하자나 불법적인 부분을 발견하긴 어렵다.
옳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게 문제다. 4000억원대 대규모 금융사고가 일어났고, 고객이 피해를 입었다.
문제가 된 펀드의 법률검토는 옵티머스의 공범이 근무하는 법무법인에서 맡았다. 정 대표는 국감장에서 '소싱하는 곳에서 법무검토서까지 받아오는 것이 통상적'이라고 해명했다. 관행이라는 것이다. 대표이사가 상품 담당 실무자에게 옵티머스와 접촉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도 '상품 소싱(sourcing;조달)은 누구나 할 수 있다'며 관행이라는 취지로 해명했다.
상품 소싱을 맡은 상품기획부장이 상품 승인 권한을 지닌 상품승인소위원회 위원장인 점도 빠른 의사결정을 위한 NH투자증권의 관행이었을 것이다. 펀드 자산 실사를 서면ㆍ샘플로만 진행하는 것 역시 같은 목적을 위한 관행이었을 것이다. NH투자증권이 지난해 판매 승인한 상품은 500개가 넘는다.
관행은 잘만 동작하면 일처리를 효율적이고 빠르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사고가 일어났을 때, '관행'이라는 대답이 책임을 면하게 해주진 않는다. '다른 회사도 그렇게 한다'는 핑계가 책임을 덜어주진 않는다.
선의의 피해자가 있는 이상, 결국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일이다.
NH투자증권과 거래하는 고객 중엔 '업계 최고의 전문가'라는 정영채 대표의 이름을 믿고 가입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농협이라는, 금융산업 중심에서 다소 비켜서있는 금융그룹 자회사 중 하나에 불과한 NH투자증권이 국내 탑 티어 증권사로 손꼽히는 이유 중 하나도 정 대표의 존재감 덕분이다. 농협에서 정 대표를 밀어낸 후 작정하고 농협 출신 경영진을 파견했다면, NH투자증권은 이미 삼류 증권사로 전락했을 거란 평가가 적지 않다.
NH투자증권이라는 브랜드의 신뢰도는 이번 사태로 훼손됐다. 정 대표 역시 의도하진 않았다 하더라도, 4000억원 규모 금융사고를 낸 상품을 사내에서 처음으로 소싱한 사람이 됐다. 증권가에서 '정 대표가 운이 없었다'는 평가와 함께 '결국 정 대표로부터 시작된 것 아니냐'는 시각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표가 직접 소싱해온 상품'이 실무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지는 검찰 조사를 통해 밝혀질 일이다.
반 년 전, 김병철 신한금융투자 대표는 라임자산운용 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김 대표는 라임운용펀드 판매와는 아예 연결고리 자체가 없었지만,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이 사장단을 질책한 후 불과 한 달만에 스스로 거취를 결정했다. 임기를 1년 조금 넘게 남겨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정영채 대표 역시 최근 극도의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용하고 차분하다는 평판이 많은 김광수 NH농협금융지주 회장이 '격노'했다는 말도 들린다. 정 대표의 임기는 2022년 3월 까지로 아직 1년 6개월가량 남았다.
농협 내부에선 벌써부터 정 대표가 임기를 모두 채우긴 어려울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다닌다. 정 대표는 2013년 웅진홀딩스 법정관리 사태 등 크고 작은 금융사고가 터졌을 때마다 피해 수습에 주력하며 정면돌파를 선택해왔다. 이번에도 정면돌파 전략이 유효할 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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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0년 10월 20일 14:35 게재]
입력 2020.10.21 07:00|수정 2020.10.22 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