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원, 위탁운용사에 연기금 매매동향 요청
자율성, 독립성 보장은 이미 옛말
국민연금 스스로 힘빼기, 영향력 낮추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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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선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크다. 금융감독원은 연기금들의 매매 동향 파악에 나섰다. 개인투자자들의 순매수와 배치되는 행보에 정부가 제동을 걸고 나선 셈이다.
종합주가지수는 3200포인트 선을 넘나들다 최근 3000선 후반에 안착했다. 지난해 중순까지만 해도 국민연금을 비롯한 연기금들이 주식시장 안정화를 위해 대규모 자금 투입을 고려했던 코스피 지수 하한선은 약 2600~2700포인트, 이제는 그 기준이 3000포인트 선까지 높아졌다. 적어도 주식시장만큼은 코로나 사태에 대한 불안감이 더 이상 반영되지 않는다. 막대한 유동성에 힘입어 주식시장엔 대규모 자금이 흘러들었다.
역대급 불(Bull)장에 힘입어 연기금들은 차익실현에 나섰다. 지난 6개월간(2020년 8월 19일~2021년 2월 19일) 연기금 계정이 순매도 한 금액은 코스피 시장 총 16조7000억원, 코스닥 시장 약 8350억원이다. 이 가운데 12조원가량은 지난 2달(2020년 12월 19일~2021년 2월 19일)에 집중됐다. 연기금 계정의 대부분은 국내 최대 연기금인 국민연금이다.
사실 연기금의 매도세가 집중된 시점에도 종합주가지수는 뚜렷한 상승 곡선을 그렸다. 종합주가지수는 지난해 12월24일 2800포인트를 기록, 불과 7거래일(2021년 1월 7일)만에 3000포인트 선을 넘었다. 개장 이래 최초, 지난해 3월 코스피지수 1400포인트 붕괴 위기부터 1년만이다.
불과 3거래일 후 코스피는 장중한 때 3266포인트를 기록하며 최고 기록을 곧바로 갈아치웠다. 결국 종가는 3140선에서 마무리 됐지만, 하루 거래금액 44조원의 역대 최대 규모 변동성을 기록한 하루(2021년 1월 11일)였다. 이날 개인투자자들은 4조4921억원을 순매수, 기관투자가들은 3조7423억원의 순매도를 기록했다.
이렇듯 지금의 국내 주식시장은 연기금과 같은 대형 금융기관이 지수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으로 보긴 어렵다. 최근 주식시장 상승의 동력은 개인투자자들이었단 점 또한 많은 기관투자가들이 인정한다. 시장의 큰 손인 기관투자가들이 개인들의 매매동향을 파악하는 게 중요한 업무가 됐을 정도다.
금융감독원은 최근 연기금의 자금을 위탁 운용하는 국내 자산운용사들을 대상으로 연기금들의 매매 동향 자료를 요청했다.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4대 연기금들의 주식 순매도와 관련한 현황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이 같은 금융당국의 요구는 상당히 이례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국내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이를 두고 “황당하다”고 표현했고, 다른 관계자는 “금감원의 파워가 아무리 세도 주식을 사고 팔고, 투자 배분 영역까지 손대는 건 너무 지나치다”고 말했다. 연기금은 위탁운용사들의 가장 큰 고객이자 정보의 통제가 우선시 되야하는 수익자이기도 하다. 고객 위탁자산의 매매동향을 살펴보겠다는 것은 범법 행위가 적발됐을 때 외엔 찾아보기 어려운 조치다.
우리나라 연기금들이 돈을 얼마나 잘 벌었나, 수익률이 얼마나 좋은가 등을 알아보기 위해 금감원이 아주 순수(?)한 의도로 접근했다고 여기기는 어려워 보인다.
경제 회복 징후가 보이고 있다며 자화자찬하는 현 정부의 근거는 코스피 3000. 문재인 대통령은 실제로 신년사를 통해 코스피 3000포인트 달성을 현 정부의 경제성과로 소개했다. 코로나 팬데믹 시국에도 우리나라 경제만큼은 탄탄하다는 것을 증명하겠단 의도로 풀이 됐지만, 상당수의 개인투자자들 국내외 연기금 모두 유동성 파티의 끝을 두려워하고 있는 시점이다. 기업의 펀더멘털과는 무관한 현재 주식시장에 대한 위기감은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인식하고 있다.
빚투(빚내서 투자)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주식시장의 개인투자자들의 수는 급증했다. 주식시장의 붕괴는 곧 개인투자자들의 손해, 그리고 개인들의 손실은 현 정부의 화살이 되어 돌아올 개연성은 충분하다.
공교롭게 일부 개인투자자들이 사회악(惡)으로 규정하는 공매도 제도는 또 한번 한시적으로 다시 연장됐다. 사실 1년 넘는 시간 동안 제대로 된 개선 방안은 논의도 이뤄지지 않았고, 재개가 된 들 이를 전후로 똑같은 논란이 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계획대로라면 4월 7일,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가 끝난 5월 3일 공매도 제도가 재개된다. 정부의 공매도 금지 연장 조치로 우리나라는 전세계 국가들 가운데 최장기간 공매도를 금지한 국가로 기록됐고, 이는 외국 주요 지수에서 배제, 외국인투자자 이탈을 이끌 가능성이 높다.
투자은행(IB) 업계 한 관계자는 “주가지수가 탄탄한 상승곡선을 이어가고 정부가 경제 정책을 어필하기 위해선 연기금의 지원 사격이 필요한데, 이번 금감원의 조치는 연기금의 최근 차익실현을 두고 정부가 불편한 기색을 나타낸 것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고 했다.
국민연금에 대한 압박은 금융당국 뿐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본격화 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포스코(국민연금이 최대주주)에 대해 국민연금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 되도록 스튜어드십 코드를 제대로 시행해 줄 것으로 요구한다”고 했다.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또한 “산재왕국 포스코, 택배노동자 과로사 문제를 방치한 CJ대한통운 등 문제기업에 대해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어떠한 방안으로든 등떠밀려 최소한의 주주권행사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비단 포스코와 CJ대한통운에만 국한한 상황은 아니어서, 4대금융지주 및 삼성그룹까지 이슈의 중심에 서 있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실효성이 있을지, 또는 그럴만한 인력과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는지는 다른 차원이다.
이래저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보니 국민연금의 활동은 더욱 위축됐다. 지난해 국민연금이 주주총회에서 반대표를 행사한 기업들 가운데 실제로 안건이 부결된 예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한항공, LG화학, 쌍용양회, 신한·우리·하나금융지주, 효성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 1~2년 새 일부 민감한 이슈가 있는 기업들에 대해선 애초에 지분율을 낮추거나 스스로 힘을 빼는 일도 나타난다. 국민연금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책임을 묻겠다던 한진칼 경영권 분쟁에서 지분율을 크게 낮춘 것이 대표적인 예다. 최근엔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투자목적을 단순투자로 변경하는 예도 허다하다.
사실상 국민연금의 기금운용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해야한다는 목소리는 이번 정부에서 나오긴 어려워 보인다. 연금을 통해 기업 경영에 깊숙히 관여하고, 정부의 입맛대로 통제하는 관치와 연금사회주의의 논란이 불거질 것이란 지적도 이미 해묵은 이야기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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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1년 02월 19일 16:37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