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고객' 확보 따라 평가 달라져
규모의 경제 달성해야 성공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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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트업 엑셀레이터 중에 하나인 와이 콤비네이터(Y Combinator)가 2019 ' 년 톱 포트폴리오 리스트를 공개한 바 있다. 다소 생소한 업체인 스트라이프(Stripe)가 에어비앤비 등 쟁쟁한 기업들을 제치고360억달러(한화 36조원)의 기업가치로 1위를 기록했다. 스트라이프는 구독경제 기반의 온라인 결제 소프트웨어서비스 업체다.
이처럼 구독경제가 하나의 큰 트랜드로 자리잡으면서 기업들이 너도나도 구독경제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기업들이 생각하는 ‘환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규모의 경제'(scale-up)와 ‘충성고객’을 확보하느냐에 따라 기업가치가 천차만별로 벌어지는 전형적인 '승자독식'의 세계로, 어설프게 흉내낼 수 있는 비지니스가 아니란 평가다.
최근 국내 자본시장에서 가장 큰 화두는 쿠팡의 미국 나스닥 상장이다. ‘72조원’의 기업가치에 투자업계 전문가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쿠팡이 내놓은 밸류에이션의 비밀은 ‘충성고객’에 있다. 쿠팡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쿠팡의 충성고객은 해가 지날수록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례로 2016년부터 쿠팡을 사용하고 있는 고객은 처음 가입한 해보다 그 다음해에는 1.37배 더 많은 지불을 하고, 5년이 된 해에는 3.59배 더 많은 돈을 쿠팡에서 사용한다. 꾸준히 신규고객이 유입되는 데다 기존 고객이 해가 지날수록 더 많은 돈을 지불한다면 쿠팡이 벌어들이는 돈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이를 기업가치에 반영하면 매년 매출이 ‘복리의 마법’처럼 불어나는 가정이 성립되어 기업가치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이런 비즈니스 모델이 가장 확실하게 작동하는 시장이 구독경제다.
구독경제라 하면 흔히 말하는 ‘빌려 쓰는(렌탈)’ 개념으로 운영되는 모든 비즈니스 모델을 말한다. 이미 대중화된 가전제품 렌탈서비스부터 소프트웨어까지 그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기업들이 구독경제를 외치는 이유는 구독을 통해 충성고객을 만들 수 있고, 이를 통해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확보할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B2C를 넘어서 기업간 거래(B2B) 영역으로 구독경제가 확대하면서 그 파괴력은 더욱 커졌다.
대표적인 영역이 바로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시장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마이크로소프트, 어도비 등 글로벌소프트웨어 기업들은 매달 정액제로 소프트웨어 사용 대가를 지불하는 구독서비스로 전환했다. 비단 글로벌 소프트웨어 업체들 뿐만 아니라 국내의 소프트웨어 업체들도 구독서비스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 최근의 큰 트랜드다.
그 이유는 구독 서비스로 전환하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경제’ 효과와 ‘비용절감’을 이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개별 고객에 맞춤형 소프트웨어를 제공했다. 하지만 구독 서비스로 전환하면 하나의 소프트웨어로 다양한 사용자가 이용가능한 ‘원 소스 멀티 유즈’가 가능하다. 이러한 변화는 클라우드 기술의 발전으로 소프트웨어 회사가 언제든 고객의 니즈를 반영해 지속적인 업데이트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클라우드 서비스형(SaaS)에 저항하던 고객들도 해당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구독 서비스 밖에 없어지고, 지속적으로 업데이트가 된다는 장점에 이끌려 충성고객이 된다. 고객이 서비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에 대해 지불하는 비용도 늘어난다. 규모의 경제를 달성한 기업은 업데이트만으로도 매년 매출을 늘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구독경제는 이익구조가 매출, 원가 및 비용으로 이뤄진 제조업과는 다른 사업구조로 밸류에이션 기법도 다르게 적용되고 있다.
구독경제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밸류에이션 기법은 월간반복매출 MRR(Monthly Recurring Revenue), 연간반복매출 ARR(Annual Recurring Revenue)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MRR을 쉽게 설명하면 요금제를 지불하는 고객(paid user)에 인당 단가를 곱해서 추산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12개월을 곱하면 연간 ARR을 구할 수 있으며, 이렇게 계산된 ARR에 기존 고객 매출증가율(Net dollar retention rate)을 감안해 기업가치를 산출하게 된다. 기존의 EBITDA 멀티플 방식과 가장 큰 차이는 기존 고객 매출증가율에 따라 매년 매출 기준점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이 차이가 쌓이면 매년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매출을 일으켜야 하는 제조업과 기업가치는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지게 된다.
기업들에 업무용 협업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잔디'를 예시로 살펴보면 잔디의 기존 고객 매출증가율은 120%에 달한다. 이는 매해 지난해 매출보다 120% 높은 매출이 이뤄진다는 뜻으로 작년에 1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면, 그 다음해에는 영업비용 투입 없이도 최소한 12억원의 매출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비용 없이 매년 매출이 증가하는 것이 기업가치에 반영되면 쿠팡의 사례처럼 기업가치가 큰 폭으로 증가하게 된다. 잔디와 같은 SaaS 업체가 회사의 중요지표로 기존 고객 매출증가율을 공개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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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IT업계 관계자는 "해외에선 구독 서비스 모델을 구축한 소프트웨어 회사의 경우 ARR에 30~50배의 배수까지 인정해주고 있다"라며 "스트라이프 같은 회사가 360억달러의 기업가치를 인정받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라고 말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규모의 경제와 충성고객을 확보했을 때의 이야기다.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위와 같은 밸류에이션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우선 구독경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초기비용이 제품을 판매하는 것보다 많이 들어간다. 행여 일정 정도의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더라도 고객의 이탈이 어이진다면 오히려 매출은 급격하게 줄어들게 된다. 기존 고객 매출증가율이 100% 이하로 떨어진다면 그회사의 매출은 해가 지날수록 떨어진다는 점에서 기업가치도 눈 녹듯이 사리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구독경제는 기업들에 ‘양날의 칼’일 수 있다. 확실하게 고객을 잡아놓을 수 있는 ‘킬러 아이템’이 없다면 더 강력한 무기를 가진 경쟁사에 먹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정점에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 글로벌 기업들의 영향력이 구독경제 시대에 들어서 더욱 커지는 것도 이런 비즈니스의 특성 때문이다.
이 관계자는 “고객유지가 구독경제의 핵심이다”라며 “유투브, 왓차, 웨이브 같은 업체들 조차도 구독 해지를 어렵게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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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1년 03월 16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