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근거로 '무위험 금융상품도 제재'
예적금까지도 규제 사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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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소비자 보호법’(이하 금소법)가 ‘강한 금융감독원’의 또 다른 이름이 되고 있다. 금감원은 해당 법을 근거로 전방위적인 상품 제재에 나서고 있다. 수익 있는 곳에 ‘리스크’가 존재하는 것이 금융의 상식이지만, 이제는 무위험 금융상품조차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금소법 통과의 계기가 된 사모펀드 뿐만 아니라, 예적금 등 일상적인 상품은 물론 지난해 인기를 끌었던 달러보험까지 규제 사정권에 들어간 모습이다.
지난달 25일부터 시행된 금소법에 대한 금융사들과 소비자들의 불만이 속출하고 있다. 예적금 상품 하나 들더라도 상품설명만 30분 이상이 들어야 하니 대표적인 ‘탁상행정’의 하나란 지적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금융위원장이 금융협회장, 은행장, 증권사 및 보험사 최고경영자들을 불러 모아 협조를 구하는 등 정부도 뒤늦게 소통을 하려는 모양새다. 그러나 금융권 전문가들은 예상보다 부작용이 클 거라고 지적한다. 논란이 될 수 있는 상품을 아예 정부가 사전 차단하는 '검열'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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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감원은 지난달 말부터 푸르덴셜생명과 메트라이프생명을 대상으로 부문검사에 돌입했다. ‘달러보험’ 판매 실태를 보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달러보험이란 납입하는 보험료와 보험사고 발생시 수령하는 보험금이 모두 달러로 이뤄지는 상품이다. 지난 2017년 달러보험 등 외화보험 매출(수입보험료)는 3000억원 수준이었지만, 지난해 판매액이 1조5000억원을 기록했다.
감독당국은 달러보험이 환위험에 노출될 수 있고, 장기 보험상품의 경우 해당 상품을 제대로 이해 못한 소비자들의 피해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달러보험 관련 ‘소비자경보’를 내고, 가입할 경우 유의사항 등을 안내한 바 있다.
그러나 보험사들에겐 이번 부문검사가 통상적인 부문검사와는 결이 다르다고 보고 있다. 이미 달러보험 실태에 대해 조사가 이뤄졌는데 또다시 부문검사에 돌입한 것은 보험사에 보내는 일종의 ‘시그널’로 받아들인다.
대표적으로 삼성생명은 금감원의 이번 부문검사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삼성생명은 지난해 11월 ‘삼성 달러종신보험’ 출시한바 있다. 외국계 보험사의 전유물이던 달러보험에 도전장을 낸 것이다. 본격적으로 상품을 팔아보려던 시기에 공교롭게도 금감원에서 메트라이프와 푸르덴셜생명의 달러보험에 대한 검사를 실시하면서 해당 검사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 고민에 빠졌다. 금소법까지 시행된 마당에 섣불리 판매에 나섰다가 금감원의 철퇴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생명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다른 보험사들도 일단은 판매를 보류하는 분위기다. 이를 두고 보험사들 사이에선 금소법을 등에 없은 금감원의 영향력에 상품 출시도 못하는 것이냐는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국민 대다수가 주식을 하는 판국에 소비자 보호법이 오히려 국민의 선택권을 제약하는 법이 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달러보험 뿐만이 아니다. 전 금융권이 금소법을 위반할까봐 공모펀드, 보험상품까지 상품 출시를 꺼리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사모펀드의 경우 매월 100조원 이상을 기록하던 판매액이 지난해 12월부터 90조원대로 떨어졌다. 특히 은행권 사모펀드 잔액은 20조원 아래로 떨어졌다. 2017년 이후 가장 낮은수준이다. 이런 상황에 금소법까지 시행되면서 사실상 은행권은 사모펀드 판매를 접은 상황이다.
한 사모펀드 관계자는 “사모펀드는 수탁은행조차도 안 맡으려는 분위기다”라며 “아예 펀드 조성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라고 말했다.
이제는 나아가 공모펀드도 출시를 꺼리고 있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지난 3월 한달간 출시된 신규펀드 112개 중에 지수연계상품인 ELF를 제외하면 17개만 일반 공모펀드에 해당됐다. 이들도 채권혼합, 일반채권 등 상대적으로 리스크가 작은 상품들이다. 운용사에 대한 책임이 강화되면서 주식상품으로 구성된 새로운 펀드를 조성하지 않는 분위기가 반영된 탓이다. 특히 시장을 주도하는 대형사들이 펀드 출시를 꺼리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금감원 내부에서는 오랜 숙원이던 금소법 통과 이후 '강한 금감원'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금소법에 은행연합회 감독권을 넣지 못한 걸 아쉬워하는 기류도 감지된다. 다만 당장은 현장의 혼란이 커 제도 안착에 집중하려는 모양새다. 강한 금감원을 추구하던 윤석헌 원장의 연임 가능성이 점점 흐려짐에 따라, 후임 금감원장이 신협ㆍ새마을금고 등 제2금융권의 금소법 편입 같은 후속 방안을 어떻게 다룰 지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한 공모펀드 관계자는 “금소법 시행 이후 해당 케이스에 시범사례가 되지 말아야겠다는 분위기가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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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1년 04월 11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