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법조계 출신이면 ESG 전문가로 ‘프리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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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들이 외풍(外風)을 막아줄 관료 출신 인사를 사외이사로 모시는 관행은 상당히 오래됐다. 외부 인사 영입 전쟁이 펼쳐졌던 지난해부터 올해 주주총회까지 국내 기업들의 전관예우(前官禮遇)는 여전했다. 역설적으로 재계에 확산하고 있는 'ESG'는 기업들이 관료 출신 인사들을 보다 ‘마음 편히’ 영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들은 ESG 경영 강화 방침을 발표하며 관련 조직을 신설하는 추세다. ESG위원회, 사회적가치위원회, 지속가능경영위원회 등등 명칭은 제각각이지만 수행 역할은 유사하다. 감사위원회, 내부거래위원회, 보상위원회 등 대부분 대기업 이사회에 설치된 소위원회의 역할도 경영 투명성 강화와 건전한 지배구조 확립이란 큰 틀의 사회적 가치 추구, 즉 ESG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ESG 경영과 이사회 역할이 점차 강조되면서 사외이사를 영입하려는 기업들의 경쟁도 심해졌다. 상법 개정으로 인해 사외이사의 임기가 최대 6년으로 제한된 점은 이사 선임 대란을 야기한 원인 중 하나다.
일부 기업들은 '전관예우'란 해묵은 관행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글로벌 기업에서 활약한 전문가를 임원으로 영입하고, 직접적인 자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업계 전문가를 내부로 끌어들여 실질적인 경영성과를 내겠다는 의도다. 투자자와 주주들 입장에선 환영할 만한 변화다.
주주들의 권익 보호가 재계 이슈로 떠오른 점도 촉매제 역할을 했다. 경영진의 전문성을 들여다보는 글로벌 기관투자가들, 기업 경영에 대해 촘촘한 감시망을 요구하는 행동주의 펀드의 활약 때문이기도 하다. 기업들의 주력 산업이 빠르게 재편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관(代官)보다 사업 전문가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일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료 출신 인사들은 여전히 활발하게 재계에 진출하고 있다. 기업들이 이들을 영입하는 목적은 분명하다. 정치적, 사법적 리스크를 막겠다는 목적이 뚜렷하다. 물론 일정 기간동안 유관 기관에 취업을 제한하는 규정을 어기는 경우를 제외하곤 법적으론 문제가 없다.
‘전문성을 갖춘’ 관료 출신 인사들이 경영진에 실질적인 조언을 하고, 이해관계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빈틈 없는 감시가 이뤄진다면 문제될 게 전혀 없다. 다만 국내 대기업 사외이사들의 이사회 안건 찬성률이 100%에 근접한다는 점을 비쳐보면 ‘사외이사=거수기’라는 공식이 유효하다.
최근엔 이사회 중심의 책임경영을 강조하는 SK그룹 마저 최근 일부 계열사 사외이사들에게 성과급 형태로 주식을 지급하면서 사외이사진에 독립성을 부여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을 갖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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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즉 환경·사회·거버넌스 등 다소 모호하고 포괄적인 개념은 관료 및 정치·법조계 출신 전관 인사를 영입하는 그럴싸한 명분이 된다.
친환경·ESG 선도기업으로 탈바꿈을 시도하는 SK에코플랜트(舊 SK건설)는 과거 박근혜 정부에서 민정비서관을 지낸 윤장석 전 부장검사를 임원으로 영입했다. 주어진 직책은 ESG파트 부문장이다. 윤 전 비서관이 기업 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모든 이력 가운데 처음이지만, 청와대와 검사 출신이란 '타이틀'은 SK에코플랜트의 핵심인 ESG부문 선봉에 서게 했다. 재계에선 검사 출신의 윤 전 비서관의 역할이 오롯이 ESG에만 국한돼 있다고 보진 않는다.
삼성그룹의 전관 출신 인사 영입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삼성물산은 정병석 전 노동부 차관을, 삼성생명은 허경욱 전 기재부 차관을, 삼성화재는 박대동 전 국회의원을 ESG위원장으로 각각 선임했다. 삼성전자의 감사위원장은 박재완 전 기재부 차관, 삼성카드의 임원추천위원회 위원장(감사위원회 및 내부거래위원회 위원)은 권오규 전 재정경제부 장관이다.
현대자동차와 기아는 ESG위원회라는 간판 대신 지속가능경영위원회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현대차는 최은수 전 대전고등법원장, 기아는 김덕중 전 국세청장이 지속가능경영위원회 위원장을 맡는다. CJ대한통운은 올해 사외이사로 선출한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을 ESG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했다. 에쓰오일도 마찬가지로 올해 주총서 사외이사로 선임한 한덕수 전 경제부총리에게 이사회 의장 자리를 부여했다.
투자은행(IB) 업계 한 관계자는 “기업 경영의 경험이 없는 인사들을 이사회 의장, 위원회 위원장이란 중책을 맡기는 것은 경영에 대한 권한을 넘긴다기 보단, 사법적·정치적 바람막이 역할에 거는 기대감이 크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들에 대한 기관투자가들의 목소리는 점차 커지고 있다. 아직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국민연금을 제외하고 글로벌 기관투자가들은 경영진의 면면과 이력, 전문성 등을 면밀히 따져 매년 주총 표결에 참여한다. 일반 주주들 또한 마찬가지다. 전문성을 갖춘 명망있는 업계 최고 전문가들을 앞세워 이사를 추천하는 주주제안 사례도 늘고 있다.
ESG의 기조에 편승하는 기업들의 노력은 바람직하다. 오너 경영인에 집중된 경영권을 이사회에 분산하고 투명한 경영을 통해 장기적으로 주주가치를 제고할 수 있다는 장점도 분명하다. 다만 이 과정에서 관료 출신 인사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과연 ESG 관점에 정확히 부합하는 인사인지에 대한 내부적인 검증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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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1년 05월 31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