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사에 치이고 인사·투자 시스템도 올스톱
총수 부재 상황 수년 간 반복할 수도
시스템 작동 안하는 삼성이 가장 큰 리스크
JY 경영능력 냉정한 평가 이뤄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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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아닌 ‘시스템’으로 움직인다던 삼성그룹은 총수가 구속되자 대내외 투자 활동을 사실상 멈췄다. 이를 방증하듯 이재용 부회장 가석방에 대한 투자자들의 기대감은 단연 “삼성의 투자 시계가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에 쏠려있다.
삼성전자는 인텔,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과의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고 ‘초격차’ 전략에도 균열이 나타났다. 그룹은 갈수록 커지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불확실성, 스마트폰의 사업의 정체 등 사업적으로 뚜렷한 미래를 그리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을 ‘위기’로 표현했다. 실제로 삼성그룹에 ‘혁신’과 ‘성장’란 단어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위기론은 확산했다.
그룹과 재계가 주장하는 ‘위기’의 원인은 역시 최종 의사결정을 내리는 총수가 없었다는 점, 즉 이재용 부회장의 부재(不在)가 절대적인 요인이었다. 자연스레 한국 경제의 주요한 축인 삼성그룹의 수장이 복귀해 과감한 투자를 결정하고 경제 회복의 발판을 마련해야한다는 논리적 연결고리가 만들어졌다.
총수의 부재가 삼성의 위기로 연결되고, 총수의 복귀가 곧바로 투자 및 경영활동의 재개에 대한 기대감으로 평가받는 현재의 상황은 삼성그룹이 뛰어난 인재와 시스템이 아니라 총수에 의한 또는 총수를 위해 움직이는 조직이란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룹이 이재용 부회장의 사법 리스크를 지우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동안 투자자들은 상당히 큰 기회비용을 치러야 했다. 개인 투자자들은 동학개미운동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내며 삼성전자 주식을 사들였지만 ‘10만 전자’의 기대감은 이미 꺽인지 오래다. 오히려 주식 시장에선 이 부회장의 가석방을 ‘호재 소멸’로 받아들이는 현상도 나타났다.
‘이 부회장이 돌아왔기 때문에 그룹이 안정을 되찾고 정상적인 경영 활동을 재개할 것이다(?)’ 라는 전제는 다시 한번 곱씹어 봐야 한다. 이미 이 부회장이 구속과 출소를 반복하며 거취에 따라 삼성그룹의 리스크와 기대감이 공존하는 상황은 상수가 됐다.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경영권 승계에 대한 재판은 아직 1심 판결도 나지 않은 상태이다. 언제든 이 부회장이 부재한 상황이 닥칠수 있다는 의미다. 총수가 다시 구속된다면? 수년간 반복해왔던 위기론을 삼성전자가 또 다시 꺼내들 여지도 있다.
삼성전자의 사업적 타개책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 부회장이 수감돼 있는 동안 파운드리 경쟁사 TSMC와의 격차는 더 벌어졌다. 인텔은 파운드리 사업을 재개한다. 파운드리 사업의 경쟁은 2강에서 3강 체제로 재편됐는데 한 축인 삼성전자의 투자 시계는 점점 늦춰지고 있다. 실제로 삼성전자의 미국의 파운드리 공장 증설계획은 4개월 이상 검토중인 상태로 머물러 있기도 하다. 삼성전자가 당장 투입할 수 있는 현금성 자산은 약 110조원 정도다. ‘운용의 묘’를 발휘했다기 보단 총수 부재의 위기론을 극대화하기 위한 고의적 실기(失期)에 가깝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삼성전자는 이 부회장의 가석방 또는 사면 등과 맞물려 대규모 M&A를 추진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올해 초 컨퍼런스콜에서 “3년 내 의미있는 M&A를 추진하겠다”고 밝혔고, 지난달엔 “인공지능·5G·전장 사업 등 다양한 기업을 대상으로 인수를 검토중”이라고 했다.
투자은행(IB) 업계 한 관계자는 “글로벌 IB들 상당수가 삼성전자가 인수할 수 있는 매물을 검토해 대기중인 상태”라며 “이 부회장의 가석방이 확정된만큼 삼성전자의 대규모 M&A가 가시화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사실 현실적으로 삼성전자가 대규모 M&A를 진행할 수 있는 기업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평가도 있다. 이종 산업의 진출을 고려하긴 어렵다. 파운드리 부문은 자체 대규모 투자를 이미 계획해 둔 상태다. 삼성전자의 인수 가능성이 거론된 기업들은 대부분 차량용 반도체, 전장 기업들이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시가총액 약 200조원), 애널로그디바이시스(약 73조원), NXP세미컨덕터(약 70조원),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약 24조원) 등이 대표적이다. 다만 해당 기업들의 몸 값도 최근 1년 코로나 시대를 맞아 지난해 대비 2~3배 이상 뛰었다.
정부는 이 부회장의 가석방을 결정한 이유를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국가적 경제상황과 글로벌 경제환경에 대한 고려차원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가석방) 대상에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결국 이 부회장이 정부의 조치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보은(報恩)을 해야하는 시점이 점점 다가오고있다는 것이 현실적인 접근이다. 다만 삼성전자의 대규모 M&A가 어떠한 방식으로 한국 경제에 긍정적인 시그널을 줄 수 있는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대선 정국을 맞아 코스피를 지탱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주가를 끌어올릴 수 있는 방안 정도를 마련 할 수는 있다.
해외 기업을 사들여 국내 고용률을 끌어올리는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정치적 논리에 휘말려 자칫 과도한 M&A 추진은 삼성전자의 진짜 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단초가 될 지도 모른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10조원 규모의 하만 인수 이후, 랜드마크가 될 만한 대규모 M&A 투자를 보여준 적이 없다. 기대를 모았던 하만은 삼성전자의 인수 이후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시너지 보단 부진한 실적이 부각하는 실정이다.
투자금융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M&A에 쏟아부을 수 있는 대기자금이 상당히 많기는 하지만 수 십조원의 투자금을 쏟아 부어 유의미한 성장 및 확장세를 보여줄 기업은 제한적으로 본다”며 “이 부회장의 가석방 이후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한 이벤트를 구상하기보단 실효성 있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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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의사결정 과정이 여실히 드러나며 삼성의 인재 육성 시스템도 재점검할 필요성이 대두했다는 평가다. 이 부회장의 구속 이후 외풍을 막아줄 유력 인사를 모시는 관행은 지속했는데 정작 사업부문별 글로벌 전문가들의 영입은 눈에 띄질 않는다.
고(故) 이건희 회장의 부재시에 권오현 전 회장,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장(부회장), 윤부근 전 부회장, 신종균 부회장 등 그룹의 중심을 잡던 인사들은 현업에서 물러났다. 삼성전자의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김기남, 고동진, 김현석 부문장의 3인 체제가 자리잡은지 4년여가 지났으나 여전히 그룹의 대규모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시스템 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IB업계 한 관계자는 “현재 최고 경영진 가운데 교체가 예상됐던 인사들도 이 부회장의 구속 수감 이후 연임에 성공하며 계열사를 이끌고 있다”며 “이 부회장의 재가 없이는 주요 경영진의 인사가 이뤄질 수 없는 구조라는 시스템의 한계를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이 부회장 부재의 상황은 언제든 반복할 여지가 있다. 투자자들은 삼성그룹의 진짜 리스크는 이 부회장의 거취가 아니라 총수가 없이 돌아가는 온전한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삼성그룹은 아직 고(故)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 부회장은 총수 복귀에 대한 기대감을 현실적으로 부응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 능력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이뤄지는 시점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