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기준금리 연 6회 인상 가능성 반영 시작...보수적 접근
보호예수 없어도 배정하는 외국인 투자자, '역차별' 논란
국내 증시, 시총 10兆 이상 IPO 소화력도 아직 부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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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기업공개(IPO) 시장이 가시밭길을 걸을 전망이다. 특히 현대오일뱅크, 쓱닷컴,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등 대어급 상장 추진 기업이 후폭풍을 고스란히 맞게 됐다.
가장 큰 원인은 매크로 환경 변화로 인한 투자자들의 보수화다. 국내의 경우 여기에 LG에너지솔루션(이하 LG엔솔) 상장 이후 국내 기관들의 불만도 표면화하고 있다. 국내 증시의 체력이 아직 빅딜(big deal)을 소화하기엔 벅차다는 점도 확인됐다.
4일 증권가에 따르면 올해 상장을 계획하거나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 시가총액 1조원 이상 '빅딜'(big deal)은 현대오일뱅크를 비롯해 쓱닷컴,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카카오모빌리티, 컬리(마켓컬리), 교보생명 등 10여건에 이른다. 이들의 예상 시가총액 합산액은 대략 50조원 안팎으로 공모가 기준 70조원이었던 LG엔솔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단군 이래 최대 공모'였던 LG엔솔 상장에 이어 이들까지 모두 연내 상장한다면, 올해 국내 IPO 시장은 사상 최대 규모로 역사에 남을 전망이었다.
문제는 LG엔솔 상장 이후 공모주 시장을 바라보는 기관들의 눈빛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LG엔솔 상장 전 투자자설명회(IR) 과정까지만 해도 나름 준수하다는 평이 많았던 현대엔지니어링이 수요예측에서 완전히 흥행에 실패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 증권사 트레이더는 "LG엔솔 상장일 주가 추이를 보며 근 2년 반동안 이어져 온 공모주 시장의 황금기가 끝났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현대엔지니어링은 회사가 나쁘다기보단 공모 시기가 나빴다"고 말했다.
매크로 환경 변화가 첫번째다. 설날 연휴 간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인사들이 여러 멘트를 쏟아내며 '3월 미국 기준금리 50bp 인상론'은 수그러들었지만, 미국 채권 시장은 이미 연 6회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을 22%나 반영하고 있다. 앞으로 올해 남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OMC)가 7회임을 고려하면 거의 매 회 인상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현지시간 2일 발표된 미국 민간 고용(ADP 전미 고용보고서)이 전월 대비 30만명 감소로 예상치(20만명 증가)에 크게 못 미치면서 경제가 침체 국면으로 벌써 접어든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치솟고 있다. 일반적으로 돈의 가치는 단기 금리에, 경기 성장성은 장기 금리에 반영되는데, 이 격차가 줄어들면 위험 징조로 받아들여진다. 한때 150bp가 넘던 미국 장단기 금리차는 현재 70bp 안쪽으로 줄어든 상태다.
당장 국내 주요 증권사 리서치도 코스피 하단을 2500까지 열어둔 상태다. 상당수 증권가 관계자들이 2800선까지 기술적 반등 후 2월 말~3월 초 FOMC 전 추가 하락을 점치고 있다. 연준의 그간 행보가 다분히 후행적이었음을 감안하면, 당분간 매파적 기조가 지속될 거란 우려도 크다.
국내 기관들의 심기도 불편한 상태다. LG엔솔을 기점으로 '형평성'에 대한 불만이 발화점까지 치솟았다는 평가다. 당분간 급등이 어려워보이는 증시 상황까지 고려하면, 국내 기관들은 적어도 올해엔 수요예측에 매우 보수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나온다.
핵심은 보호예수(락업) 기간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락업을 걸지 않고도 더 많은 주식을 배정받아 상장 당일 매도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카카오뱅크는 물론 SK IET, 크래프톤에 이어 LG엔솔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LG엔솔은 이번 공모에서 기관에 2337만주를 배정했다. 이 중 외국인 투자자가 55%인 1285만여주를 받아갔다. 이 중 72%인 937만여주가 보호예수 미확약 물량이다. 상장 후 2거래일간 이 중 568만주가 매물로 나왔다. 국내 기관들은 전체 신청 주식 수의 27%가 3개월, 37%가 6개월 확약을 제시했지만 전체 기관 물량의 45%밖에 배정받지 못했다.
한 자산운용사 주식운용본부장은 "2011년 이후 국내 해외 기관 수요를 통합 배정하는 원북(one-book)이 보편화했지만, 여전히 외국인 투자자에게 50~60%의 물량을 선배정하는 행태는 바뀐 것이 없다"며 "외국인 역시 국내 기관과 같은 잣대로 물량을 배정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는 국내 기관들에 극심한 박탈감을 안겼다는 지적이다. LG엔솔 상장 당일 일부 중소형 기관은 보호예수 확약을 파기하고 주식을 당일 매도하는 방안까지 고려했다는 후문이다. 이 경우 이후 6개월간 수요예측 참여가 금지되지만, 6개월간 팔지도 못하는 주식을 안고 하락장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에서다.
이 같은 기관들의 행보는 발행사와의 시각 차이가 벌어지는 핵심적인 이유가 된다. 여전히 발행사들의 몸값 눈높이는 지난해 코스피가 사상 최고점을 돌파할 때의 시점에 고정돼있다는 평가가 많다. 요구하는 몸값에 시장이 맞춰주지 않으면 발행사 입장에선 상장을 취소할 수밖에 없다. 현대엔지니어링 상장 철회가 대표적이다.
금융당국 역시 이 같은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 다만 공모주의 청약 및 배정과 관련해 발행사 및 주관사의 재량을 늘려오던 그간의 정책 방향을 고려하면, 갑작스러운 규제 도입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대외적으로 목소리를 낼 대표 기관 역시 없다. 이전같으면 자산운용협회에서 총대를 맬 수 있는 이슈지만, 금융투자협회로 통합된 후 증권사의 목소리가 과다 대표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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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엔솔로 인해 국내 증시의 체력이 아직 초대형 IPO를 소화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이 각인됐다는 점도 부담으로 꼽힌다.
LG엔솔이 촉발한 수급 공백은 미국발 긴축발작(테이퍼 텐트럼)과 맞물린 외국인 매도세와 맞물려 지난 1월 폭락세의 원흉이 됐다. 지난 1월 코스피 월간 하락률은 10.5%, 지수 낙폭은 314.31포인트로 2008년 10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3년만에 가장 컸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도 지난달 말 '한국투자전략' 레포트를 통해 이 같은 점을 지적했다. 골드만삭스는 "올해 한국 증시 IPO 발행 규모는 역채 최대치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IPO 발행 호조는 지수 수익률 약화와 관련이 있다"며 "최근 IPO 주식들은 코스피 선행 주가순이익비율(PER) 대비 200%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는데, 이는 금리 상승기에 시장을 더욱 민감하게 만든다"고 짚었다.
특히 시가총액 10조원 이상 거래가 상장한 달의 평균 월간 수익률을 따져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1%대를 기록한 것을 비롯, 코스피 대형주들이 대부분 하락하는 경향을 보였다. 시가총액 10조원대 거래가 한 해에 몇 개씩 상장할 수 있는 토양 자체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LG엔솔의 경우 국내 증시의 저평가 매력마저 반감시켰다. LG엔솔 상장을 전후해 코스피 지수는 3% 이상 급락했지만, 12개월 선행 PER 등 주요 밸류에이션 지수는 오히려 상승한 것이다. 보통 12개월 선행 PER이 10배 이하면 저평가 구간이라고 보는데, LG엔솔 상장으로 인해 9.7배였던 PER이 9.96배로 오르며 저평가 매력이 사라졌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한 공모주 펀드 운용역은 "하락장 초입에 LG엔솔이라는 '매'를 맞으며 신규 상장이 증시에 미치는 악영향을 압축적으로 경험했다고 보면 된다"며 "6개월 보유 확약을 맺은 크래프톤 평가 손실까지 감안하면 올해엔 빅딜이라도 무조건 보수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