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원자재 급등으로 수익성 악화 심화해
무분별한 조달로 한전채 쏟아내며 시장 교란도
차기 정부가 받아들 '청구서'…"건전성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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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원전을 주력 기저 전원으로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고 언급하며 업계가 발칵 뒤집혔다. 주요 원전 관련 기업 주가가 급등하기도 했다. 다만 시장에선 현재로선 대통령이 임기 말 발언이 큰 의미는 없다고 보고있다. 기존의 ‘탈(脫)원전 정책’과 큰 틀에서 달라진 점이 없기 때문인데, 실제로 문 대통령이 입장 번복의 비판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발언을 덧붙이기도 했다. 다가오는 대선을 의식한 발언에 그친다는 비판이 나온다.
대통령의 발언이 논란이 되면서 ‘탈원전’의 희생자(?)로 꼽히는 한국전력공사(한전)의 ‘사상최대 적자’가 이슈가 되고 있다. 글로벌 탄소중립 기조에 따른 신재생 에너지 확대,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불안 고조로 올해도 한전의 실적 개선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한전이 적자를 메우기위한 채권 발행을 쏟아내며 시장 왜곡을 이어가는 가운데 적자 해소의 핵심인 전기료 인상 여부가 차기 정부에서도 해결이 쉽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한전은 지난달 24일 지난해 연결기준 5조8601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고 공시했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기록했던 역대 최대 규모의 영업손실(2조7980억원)의 2배 수준이다. 매출액은 전년의 58조5693억원에서 소폭 증가한 60조5748억원을 기록했지만, 연료비와 전력구입비 증가 등으로 영업비용이 큰 폭으로 증가하면서 적자전환했다.
글로벌 신용평가사도 한전의 재무건전성에 경고를 보냈다. 지난달 28일 무디스는 “지난해 한전의 대규모 손실은 전년 대비 상당히 약화된 실적으로 신용도에 부정적”이라고 언급했다. 무디스는 연료비 증가를 상쇄할 수 있는 요금인상과 더불어 비용 감소 및 설비확장을 위한 투자의 현저한 감소가 없다면 향후 12~18개월간 한전의 재무지표에 압력이 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무디스는 영업손실, 송배전망과 발전설비 확장 및 신재생에너지원 개발을 위한 설비투자와 관련한 차입증가로 인해 2021~2022년 한전의 조정차입금 대비 FFO(Funds From Operations) 비율이 6~10%로 2020년의 18.6% 대비 하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2021년말 기준 한전의 조정전 차입금 (금융리스 제외)은 약 80조5000억원으로 2020년말의 69조7000억원 대비 증가했다.
한전의 적자가 불어난 데에는 비용은 증가하는데 전기요금은 동결된 점이 크다. 발전자회사를 통한 발전 비용, 민자발전사로부터 전력구매 비용, 환경규제 준수 비용은 꾸준히 증가하는 가운데 비용 증가분이 요금에 반영되지 못하면서 대규모 손실이 발생했다. 한전이 발전사에서 사들이는 전력도매가격(SMP)은 작년 연간 평균 SMP의 2배가 넘는 kWh당 200원으로 올랐다. 지난해 1월 1톤당 413달러 수준이던 액화천연가스(LNG) 수입가격은 연말 892달러로 2배 이상 치솟았다.
전기요금의 구조적 딜레마는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과도 연관이 깊다. ‘탈원전 정책으로 인한 전기요금 인상’이라는 여론을 피하기 위해 정부는 지난해 전기요금을 동결했다. 정부는 지난해 1분기 전기요금을 1kWh당 3원 낮춘 후 요금을 지난해 3분기까지 유지하다 지난해 4분기 1kWh당 3원을 높이며 요금을 원상복구 시켰다.
상대적으로 전력 조달비가 싼 원전 이용률이 급격히 줄은 점도 손실폭을 키웠다. 지난해 국내 원전 이용률은 74.5%로 이전 박근혜 정부의 2014년(85.0%)과 2015년(85.3%) 대비 10%포인트 이상 낮아졌다.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 하에서 신한울 1호기·신한울 2호기·신고리 5호기의 준공은 연기됐고 월성 1호기 가동이 중단됐다. 1월 기준 1kWh당 발전단가는 원자력이 61.5원으로 LNG(206.2원), 석탄(135.5원), 석유(215.5원) 등에 비해 크게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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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적악화가 심화하면서 한전 주가도 힘을 쓰지 못했다. 현 정부 출범(2017년 5월 10일) 바로 직전인 2017년 3월 한전의 주가가 4만9000원을 호가했던 점을 고려하면 지난 5년 내 한전 주가는 55% 이상 감소한 셈이다.
시장에서는 한전 부실화가 ‘이제 시작’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국내 9개 증권사(삼성, 키움, 신영, 한국투자, 현대차, 하나금융, 메리츠, NH, 이베스트)는 2022년 한전의 적자가 확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022년 당기순이익 기준 2조5000억~11조원 수준의 적자가 전망된다. 특히 2022년 상반기 적자 규모가 확대되면서 수익성이 악화할 것이란 전망이다. 비용부담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분쟁이 장기화되면서 원자재 가격상승을 피하기 힘들 것이란 관측이다.
신재생 에너지 확대 하에 커지는 투자부담도 무시할 수 없다. 유진투자증권은 “한전의 투자비 계획은 15조원이나 평균 집행률 80%를 고려해도 잉여현금흐름(FCF) 적자 지속, 부채비율이 300%에 도달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무엇보다 차기 정권이 ‘한전 부실화’ 청구서를 어떻게 받아들일 지가 문제다. 정부는 지난해 2022년 4월과 10월 두번에 걸친 10% 수준의 전기요금 인상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다만 코로나로 인한 경제불안, 물가 압력 부담 등을 감안하면 현실화는 미지수다. 무디스는 현재까지 발표된 요금인상이 지연 또는 취소될 경우 한전의 재무지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관측했다.
여야 후보의 에너지 공약을 보면 불확실성이 크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는 ‘전기요금 인상안 백지화’를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전기 요금 인하와 관련된 구체적 언급은 없지만, 탄소중립 의지 강화(신재생에너지 확대)와 ‘감(減)원전’을 에너지 정책 공약으로 제시했다. 윤 후보의 전기요금 인상 백지화는 한전의 수익성 개선을 더디게 할 가능성이 크고, 이 후보의 신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은 한전의 투자 부담을 확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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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 적자’는 비단 한전만의 문제가 아닌 시장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한전이 부족한 자금을 메꾸기 위해 무분별한 조달을 이어가고 있고, 이는 채권 시장에 수급 부담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전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매월 1조~2조원 수준의 한전채를 쏟아내고 있다. 지난해 6월부터 12월까지 7개월여간 찍어낸 물량만 10조4300억원에 달한다. 올해 들어서는 더욱 공격적으로 한전채를 발행 중이다. MBS(주택저당증권)을 제외하면 공사채 중 최대 발행량이다. 1~2월 한전채 발행은 공사채 발행 중 30%를 차지한다.
이렇다보니 공기업으로 최고 신용도를 가지고 있는 한전의 시장 내 위상 추락도 빠르게 나타났다. 오버발행을 이어가며 한전채 자체 금리가 급등했고 전반적인 공사채 스프레드(가산금리)마저 벌어지고 있다. 한전채의 발행 금리는 3%를 넘나들고 있는데, 이는 최근의 금리 상황과 투자 수요 위축을 고려해도 다소 높은 편이다. 한전채 몸값이 떨어지며 디스카운트(저평가)도 심화하고 있다는 평이다. 한전이 시장상황 고려 없이 10년 장기물 등 시장과 괴리가 있는 발행 조건을 설정하면서 가격 부담을 높이는 등 시장 왜곡을 이어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그렇지 않아도 크레딧 시장이 수요가 받쳐주지 않는데 한전이 발행을 대규모로 하면서 크레딧 채권 전반에 수급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한전 적자가 해소되지 않는 한 계속 한전채를 찍어낼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적자가 해소되려면 전기요금을 인상하거나 전기를 사오는 도매가가 낮아져야 하지만 국내에선 대선, 글로벌에선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원자재 상승으로 두 조건 모두 지금으로서는 가능성이 높지는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 에너지 불안과 친환경 투자 확대와 맞물려 올해 한전의 적자는 계속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이고, 나아가 전반적인 공공기관 건전성이 도마 위로 오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