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금리 올리고 ESG 테마 얹어도 조달 부담 커
수요예측 일정까지 바꾸지만 투자자는 신중한 행보
기업 자금조달 전략 단기화…당분간 추세 이어질 듯
-
- 이미지 크게보기
- (그래픽=윤수민 기자)
채권 시장이 급속히 냉각되며 기업들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기업들은 조달 금리를 올리고 수요예측 일정을 바꾸며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테마까지 가미하고 있지만 자금 조달이 원활하지 않은 모습이다. 이런 상황은 경기하강과 금리 상승, 우크라이나 사태 등 변수가 이어지고 있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작년과 올해 회사채 시장의 분위기는 천양지차다. 작년엔 우량 기업은 물론 웬만한 비우량 기업들도 투자금이 몰리며 회사채를 쉽게 발행할 수 있었다. 올해는 발행금액 대비 4배를 넘는 수요가 몰린 LG디스플레이(신용등급 A+), 2300억원 모집에 6300억원이 몰린 에쓰오일(AA, 안정적) 등 사례도 있었지만 대체로 원하는 발행 규모와 조건을 충족하기 어려운 분위기다. 각종 변수에 기업도 투자자도 보폭이 좁아졌다.
SK어드밴스드는 1500억원 채권을 발행하는데 그에 못미치는 수요가 들어왔다. 자연히 금리는 밴드 최상단에서 정해졌다. 현대케피코도 밴드(민평금리±20bp, 1bp=0.01%) 최상단에서 발행 금리가 결정됐다. 최근 금리 상승세가 가파르다 보니 밴드 상단에서라도 발행하면 다행이라는 평가가 따랐다.
투자 수요가 몰려 발행 금액을 늘린 기업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화에너지는 1000억원 규모 회사채를 발행하려다 투자 수요가 많아 규모를 1210억원으로 늘렸는데 금리는 밴드 상단에서 정해졌다. 한화토탈은 발행 규모를 2000억원에서 2900억원으로 증액했는데 금리는 3년물과 5년물 모두 밴드 상한(+30bp)에 가까운 +27bp, +28bp 수준이었다. 세아베스틸 역시 발행 목표 규모보다는 살짝 많은 투자 수요가 있었지만, 금리는 밴드 가장 높은 선에서 결정됐다.
-
작년과 올해 모두 회사채를 발행한 기업들의 상황을 살피면 분위기 변화가 더 두드러진다.
현대중공업지주는 작년 10월28일 이후 약 넉달 만에 회사채를 발행했다. 작년엔 투자 수요가 몰리며 총 1500억원에서 2200억원으로 증액 발행했는데, 올해도 계획 대비 2배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2년물과 3년물 발행 금리는 각각 3.192%에서 3.639%, 3.63%에서 4.105%로 높아졌다.
SK매직은 작년 회사채(5회) 발행땐 금리가 밴드(민평금리 -20~+20bp) 하단인 -15bp에서 결정됐지만 올해는 밴드 최상단(+40bp)에서 결정됐다. 금리가 1.518%에서 3.164%로 두배 이상 높아졌다. 한솔제지는 작년 700억원 회사채 발행에 8000억원이 넘는 수요가 몰리며 흥행했고, 개별민평 대비 69bp 낮은 금리(1.558%)에 발행 규모(700억원→1000억원)도 늘릴 수 있었다. 올해도 발행 계획보다 투자 수요는 많았지만 경쟁률은 작년만 못했고 금리도 밴드 최상단으로 줘야 했다.
SK에코플랜트 역시 작년과 올해 채권시장의 온도차를 절감하고 있다. 작년엔 2년물과 3년물 1500억원 발행에 1조원 이상의 투자 수요가 몰려들며 발행 규모를 두 배로 늘렸다. 올해는 일부 미매각이 발생하며 발행 규모는 1500억원으로 유지됐다. 2년물 금리는 작년 2.312%에서 올해 3.603%로, 3년물은 2.61%에서 3.924%로 50% 이상 올랐다.
SK에코플랜트는 수요예측 일정까지 바꾸며 회사채 발행에 공을 들이기도 했다. 당초 2월21일(월요일) 수요예측을 진행할 계획이었지만 이를 2월18일(금요일)로 앞당겼다. 월요일에 수요예측이 몰려 흥행이 어렵다는 이유였는데 실제로는 큰 차이는 없었다. 그보다는 해외 전기전자 폐기물 기업 인수(2월21일 TES 인수 발표)를 염두에 뒀을 것이란 시선이 있다. 공격적인 M&A 행보로 가뜩이나 재무구조가 약화한 상황에서 추가로 대형 M&A를 발표하면 투심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형 M&A 계획을 알았더라면 수요예측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란 기관도 있다.
웬만한 우량기업들도 수요예측에서 미달되고 금리를 밴드 상단까지 올리고서야 원하는 발행 규모를 맞출 수 있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경기하강과 물가 상승, 각국 중앙은행의 긴축 정책, 우크라이나 사태 등 각종 변수가 이어지면서 회사채 투자자들도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작년 각광받던 ESG 관련 채권들도 올해는 다르다. 이를테면 에너지원이 얼마나 친환경적이냐보다 종류를 불문하고 에너지원 자체를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 시기다. 작년엔 ESG 글자만 붙으면 날개 돋친듯 채권이 팔려 나갔지만 올해는 SK에코플랜트(3년물), 한솔제지(2년물), 한화토탈(5년물), 한화에너지(3년물) 등 ESG 관련 채권들도 수요예측 흥행에 실패하거나 금리를 후하게 얹어주고서야 발행이 이뤄졌다. 그나마 여전NCC처럼 ESG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진 회사의 채권은 시장의 철저한 외면을 받았다.
회사채는 대표적인 장기 자금 조달 수단인데 최근엔 상당수 물량이 2~3년 만기로 발행됐다. 시장 변동성이 커진 만큼 채권 투자자들이 장기 투자에 부담을 느끼고 있고, 이 때문에 기업들의 자금 조달 구조도 단기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작년 좋은 금리에 회사채 발행 규모도 늘렸던 KCC는 올해 일반 기업어음(CP)로 눈을 돌렸고 발행 규모도 크게 줄였다. 여신전문금융사들도 단기 회사채, 기업어음(CP) 등으로 눈을 돌리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한 채권 투자사 관계자는 “투자사들이 장기 투자를 기피하면서 기업들의 자금 조달 수단도 단기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며 “1년 새 회사채 금리가 2배가 되며 기업들의 고민이 깊어졌는데 이런 상황은 올해 내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