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방산도 ESG 포함' 목소리
원자력 '녹색산업' 분류하는 등 특정 선진국 유리한 결정
결국 '글로벌 금융 주도권 싸움'의 일부...국내서도 돈벌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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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유럽연합(EU) 일각에서는 방위산업 투자를 ESG(환경ㆍ사회ㆍ지배구조)에 편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실제로 스웨덴 SEB은행은 오는 4월부터 다시 방위산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지침을 바꿨다. '새로운 지속 가능성 정책'을 시행하며 방위산업에 대한 투자를 금지한 지 불과 1년 만의 일이다.
방위산업은 그간 담배 제조, 도박ㆍ카지노업 등과 함께 대표적인 '죄악주'(sin stock)로 분류돼왔다. 결국은 인명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기술ㆍ장비에 대한 투자인 까닭이다.
방위산업을 ESG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논리는 단순하다. '시민에게 안전과 보안을 제공하는 것'은 ESG 중 사회적 요소(Social)에서 일정 부분 인정할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나쁜 사람들'이 무기를 사용할 수 없도록 판매 조건을 강화하고, 실제로 어디서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니터링할 필요가 있다는 전제 아래서다.
핑계야 어쨌든, 이런 주장 역시 ESG가 결국 '코에 걸면 코걸이'식 헤게모니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힘을 실어준다.
다른 사례를 보자. 앞서 올해 초, EU 집행위원회는 원자력 발전을 녹색산업 분류체계(택소노미·Taxonomy)에 포함시키는 사안을 확정했다. 원자력이 지속 가능한 친환경 저탄소 발전이라는 인증으로, ESG 체제 내에서도 원자력에 투자를 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원자력이 녹색산업인지 여부는 지난 수년간 상당한 논란을 불렀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12월 한국형 택소노미를 확정하며 원자력을 제외하기도 했다. 반면 EU는 '중대 위험 초래 여부'를 기준으로 원자력을 평가했고, '땅속 깊이 핵폐기물을 저장하면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EU가 원자력을 녹색산업으로 인증할 거라는 전망은 이미 지난해 초부터 제기됐다. EU는 최근 수년간 풍력ㆍ태양열 등 재생에너지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집행했지만, 발전량이 안정적이지 못해 애를 먹어왔다. 러시아산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가 많이 늘어나는 부작용을 겪기도 했다. 그렇다고 화석연료 발전을 통해 탄소 배출을 다시 늘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타개책은 원자력 말고는 마땅치 않았다.
상식적으로 인류의 지속가능성에 가장 큰 위험이 될 수 있는 핵에너지가, 지속가능성을 전면에 내건 ESG 체제의 품에 안긴 배경이다.
애초에 ESG는 만들어진 헤게모니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ESG라는 말이 처음 글로벌 무대에 등장한 건 2005년 유엔글로벌콤팩트(UNGC)였다. 금융업에서의 ESG의 시초로 꼽히는 유엔책임투자원칙(UN PRI)은 2006년 나왔다. 그 뒤 10년 이상 ESG는 구호에 불과했다.
ESG가 갑자기 전 세계를 주도하는 헤게모니가 된 건 2017년의 일이다. EU가 500인 이상 기업에 대한 ESG 정보 공개를 의무화한 것이다. 이어 EU는 2019년 기후 비상사태라며 '그린 딜'을 선언했다. ESG '환경' 항목 평가 요소는 주로 이 '그린 딜' 선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를 두고 EU가 미국에 내준 글로벌 경제ㆍ금융 주도권을 되찾아오기 위해 전략적으로 ESG를 미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EU와 날을 세우며 프랑스ㆍ독일 등 유럽 주요국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방위 분담금 확대 등을 압박하고 있었다.
특정 국가, 특정 집단을 위한 헤게모니로 의심받는 만큼, 곳곳에서 '위선'도 드러나고 있다.
EU에서 주창한 ESG 헤게모니가 미국에서도 주류가 된 건 미국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역할이 컸다. 블랙록은 2019년 세계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개편되고 있다며 ESG 투자를 통해 이를 돕겠다고 선언했다.
블랙록이 운용하는 대표적인 ESG펀드인 'ESG 어웨어 MSCI USA ETF'(이하 ESGU)는 현재 설정액 규모가 31조원에 달하며, 연평균 18%의 수익률을 내고 있다. ESGU에 투자하는 건 세계의 지속가능성에 힘을 싣는 '착한 투자'라는 공식까지 만들어졌다.
그런데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블룸버그의 올해 초 심층 보도에 따르면 벤치마크 지수인 MSCI의 기업 ESG 평가등급은 환경ㆍ사회적 영향과 거의 관계가 없었다. S&P500 기업 중 지난해 ESG 평가등급이 오른 155곳 가운데 실제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인 곳은 단 1곳에 불과했다. ESGU 펀드 내 화석연료 관련 기업 주식 비중은 S&P500 내 비중보다 오히려 높았다.
2018년부터 2년간 블랙록의 글로벌 지속 가능투자 부문 최고투자책임자(CIO) 였던 타리크 팬시는 지난해 9월 개인 투고를 통해 ESG를 '위험한 위약'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블랙록 ESG 투자의 최전선에 있던 전도사가 내부 고발자로 변신한 셈이다.
국내에서도 ESG는 거스를 수 없는 물결처럼 보인다. 다만 'ESG가 뭐냐'고 물으면 아무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어떤 이는 정의와 환경을 말하고, 어떤 이는 경제 민주화를 말하며 어떤 이는 노동이사제를 말한다.
이렇다 보니 아무런 경력이 없더라도 석ㆍ박사 논문 제목에 'ESG'만 쓰여있으면 금융회사들이 앞다퉈 모셔간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국내 대형금융지주들은 이사회에 여성 사외이사를 고작 한 명 포함시키곤 'ESG 경영에 앞장선다'고 홍보한다. 일부 컨설팅 회사와 언론사는 'ESG 평가'를 통해 돈벌이에 나서고 있다.
학계 일각에선 ESG를 '선진국에 의한, 개발도상국에 대한, 신(新)제국주의'로 규정하기도 한다.
'인류를 위한다'는 미명 하에 선진국들이 지금의 도덕적ㆍ기술적ㆍ경제적 우위를 고착화 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일정 부분 곱씹어 볼 만한 가설이다. 1960년대에 ESG가 득세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 공업화의 핵심이었던 석탄ㆍ석유 발전은 물론, 철강ㆍ화학 등 한강의 기적을 만든 중공업이 모두 규제당했을 것이다.
지금은 명분과 글로벌 자금이 모두 ESG에 쏠려있으니, 일개 투자가나 일개 회사가 이런 기조에 대놓고 반발하긴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ESG는 절대 선이 아니며, 특정 집단을 위해 만들어진 헤게모니의 자취를 지우기 어렵다. 앞다퉈 ESG를 경영의 기준으로 입에 올리고 있는 국내 최고경영자들을 바라볼 때마다 뒷맛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