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DP 대비 원유ㆍ원자재 무역 수지 적자폭, 한국이 아시아 최고
FOMC 불확실성 해소에도 외국인은 코스피서 조 단위 탈출
글로벌 인플레이션 우려 잦아들어야 외국인 투자 돌아올 듯
-
- 이미지 크게보기
- (그래픽=윤수민 기자)
원자재 가격 상승에 취약한 소규모 개방경제 국가의 한계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증시에선 외국인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원달러환율은 1달러당 1250원을 돌파하며 2016년 유로존 위기,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단순히 전쟁으로 인한 리스크 회피 심리 때문만이 아니라는 분석이다. 한국과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신흥국 증시엔 반대로 자금이 밀려들고 있다. 3월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이후 불확실성이 해소되며 미국 증시는 불을 뿜었지만, 코스피는 2700선을 힘겹게 사수하고 있다.
'한국은 인플레이션에 가장 취약한 나라'라는 평가가 현 상황을 설명하는 핵심 배경으로 꼽힌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지난 2월20일 이후 한 달 동안, 코스피에서만 6조원의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갔다. 코스닥과 선물시장 순매도까지 고려하면 이탈 자금은 8조원에 가깝다. 38%대까지 치솟았던 코스피 외국인 지분율은 30%대 초반으로 급락했다. 2016년 이후 6년만에 최저 수치다.
올 들어 국내 증시의 외국인 수급은 들쑥날쑥했다. 불확실성으로 인한 긴축발작(테이퍼 텐트럼) 우려가 극에 달했던 지난 1월엔 증시에서 총 4조원의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갔다. 2월 들어 불확실성이 해소되자 코스피에 다시 2조원이 넘는 순매수가 쏟아져 들어왔다. 바이오 및 소재 산업 부진으로 인해 코스피와 코스닥이 비동조화(디커플링)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2월20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상황이 다시 바뀌었다. 외국인들은 엑소더스(대탈주) 수준으로 국내 주식을 집어 던졌다. 코스피 지수가 2600선마저 위태로울 정도로 밀려난 건 외국인의 순매도 행렬 탓이었다. 1월 외국인의 순매도 속에서도 1200원은 넘지 않던 원달러 환율은 극심한 변동성을 보이며 1250원선까지 치솟았다.
전쟁으로 인한 리스크 회피 심리 탓은 아니었다는 평가다. 신흥국 증시로는 여전히 자금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인도네시아 IDX지수는 연초 이후 10%, 3월 이후에도 4% 올랐다. 말레이시아 KLCI지수와 베트남 호치민VN 지수 역시 2월 초와 비교해 강세를 보이고 있다. 한국과 중국ㆍ홍콩 증시만 이 같은 추세에 역행하고 있다.
'자원의 차이'가 핵심 배경으로 꼽힌다. 한국은 원자재ㆍ원유 등 글로벌 인플레이션에 가장 취약한 나라로 손꼽힌다. 모건스탠리 등 글로벌 투자은행 리서치에 따르면, 한국은 아시아 국가 중 지난해 4분기 잠정 국내총생산(GDP) 대비 주요 원자재 무역 수지 비중이 가장 나쁜 국가였다. 석탄ㆍ천연가스 등 지하자원은 물론, 원유와 곡물값 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에 가장 취약하다는 뜻이다.
-
- 이미지 크게보기
- (그래픽=윤수민 기자)
한국은 비슷한 소규모 개방경제 국가인 대만이나 필리핀보다도 글로벌 인플레이션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 국가로 손꼽힌다. 처지가 더 좋지 않은 곳은 싱가포르 정도다. 올해 한국의 예상 경제 성장률은 2.8% 안팎에 그친다. 이는 대만(3.4%)보다도 낮은 수치이며, 원자재 부국인 말레이시아(6.6%)나 인도네시아(5.8%)의 절반에 그친다.
반면 인플레이션의 척도인 CPI 전망치는 3.6%로 대만(2.5%), 말레이시아(3.3%), 베트남(3.1%)을 앞선다. 국제 원유 및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해 경제성장률은 아시아 개발도상국들에 비해 크게 떨어지고, 물가는 더 많이 오르며 국내 소비 여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한 자산운용사 운용역은 "성장과 소비가 줄어드는 국가의 기업 이익이 드라마틱하게 늘어나거나, 밸류에이션이 높아지긴 쉽지 않다"며 "전쟁으로 인해 공급망이 다시 경색되면 반도체ㆍ자동차 등 국내 주력 수출품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우려도 반영된 것 같다"고 말했다.
외국인 자금이 잇따라 빠져나가며 원달러환율도 치솟았다. 3월 초엔 장중 1250원 부근까지 다가서기도 했다. 1250원선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역사적 고점에 가까운 수준이다. 시장에서 달러화가 귀해지며 이달 중순 달러-원 1년물 스와프 레이트는 마이너스(-) 0.5% 가까이로 뚝 떨어졌다. 스와프 레이트가 마이너스가 되면 원화 투자자는 손실을 보고, 달러화 투자자는 스와프 레이트만큼의 수익을 가져가는 구조다.
국내 주식을 매도한 외국인 투자자들은 대신 국내 채권을 매수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월 외국인은 상장 채권 6조4000억여원어치를 순매수했다. 이는 한국의 펀더멘털이 견조하기 때문이 아니다. 스와프 레이트가 마이너스로 돌아섬에 따라 차익거래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미국 국채 2년물과 한국 국채 2년물 사이엔 10bp(0.1%포인트)의 스프레드(격차)가 있다. 여기에 스와프 레이트를 통한 50bp 수준의 환차익까지 고려하면, 미국 국채 2년물보다 한국 국채 2년물에 투자하는 게 대략 60bp의 추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셈이다.
최근 원달러환율이 다시 1210원대로 내려오며 안정세를 되찾았지만, 스와프 레이트는 크게 개선되지 않은 상황이다. 아직 한국을 바라보는 외국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방증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증시의 반등 탄력성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다. 3월 FOMC 종료 이후 불확실성이 다시금 해소되며 미국 주요 지수는 2020년 12월 이후 1년 4개월만에 가장 높은 주간 상승률을 기록했다. 3월 셋째주 나스닥 주간 상승률은 8.1%에 달했다. 반면 코스피는 2%에도 미치지 못했다. 외국인들은 이 한 주 동안에도 코스피에서만 1조3000억원이 넘는 매물을 쏟아냈다.
한 증권사 트레이더는 "3월 FOMC에서 5월 이후 양적긴축(타이트닝) 실시 등 매파적 발언이 쏟아져 나왔지만 결국 핵심은 '전쟁으로 인한 불확실성 때문에 기준금리는 25bp만 올리겠다'는 내용이었다"며 "연준이 전쟁을 핑계로 긴축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며 주가가 급등했는데, 코스피는 여기서 소외된 것"이라고 말했다.
연준이 3월 FOMC에서 내놓은 점도표는 올해 6번 및 내년 2번, 총 8번의 금리 인상을 예고하고 있다. 반면 총재 교체기를 맞이한 한국은행은 5월 1회, 하반기 1회 등 올해 총 2번의 금리 인상이 예상된다. 지난해까진 한국은행이 선제적으로 금리를 올리며 긴축에 나섰지만, 올해부터는 연준이 더 빠르게 기준금리를 인상하며 달러화의 가치가 원화 대비 상대적으로 강해질 우려도 부각된 상태다.
결국 원자재 수급 우려를 불러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마무리되고, 원유 가격 등 글로벌 인플레이션 우려가 완화된 후에야 환율이 안정되고, 국내 증시도 빛을 볼 수 있을 거란 평가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당분간 국제 유가가 원달러 환율의 방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될 것 같다"며 "전쟁의 향방, 중국의 제로코로나 정책 및 경기 부양 의지 등 외생 변수에 당분간 휘둘릴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