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 급감·미매각 속출하며 "힘겨운 1분기"
한전채 1분기에만 10兆 발행…수급 부담 계속
롯데,투자 확대로 조달↑…SK·한화도 발행多
KB證 주관 1위로 출발…산은 순위서 안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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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들의 곳간 쌓기가 이어졌던 지난해 연초와 달리 올해 채권시장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금리 인상, 우크라이나 사태 등 국내외에서 이슈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면서 냉기가 흐르고 있다. 연초 효과가 무색하게 대기업들은 발행을 줄였고 투자자들도 회사채 투자를 꺼리고 있다. 한국전력공사가 여전히 한전채 물량을 쏟아내며 시장에 부담을 주고 있는 가운데 올해 조달 계획을 세우는 기업들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금리 변동성에 작년 9월 하반기 이후로 회사채 시장이 계속 침체기지만 그래도 올해로 넘어오면 시장 회복을 향한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 긴축 스탠스, 대선 불확실성, 여기에 우크라이나 사태까지 겹치며 연초 효과는 ‘잠깐’에 그쳤고 투자심리도 좀처럼 살아나지 못했다. 대부분의 시장 관계자들이 “1분기 국내 회사채 시장은 굉장히 힘들었다”고 평했다.
지난해 초에는 분위기가 정반대였다. 그해 2월 LG화학이 국내 일반기업 최대 규모 회사채를 발행하고, 4월에도 SK하이닉스가 같은 금액의 회사채를 발행하는 등 대기업들의 채권시장 조달이 활발했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기업들의 실적도 어느 정도 안정화했고, 등급 불확실성도 걷히면서다. 또 국내 채권시장에 ESG채권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주요 발행사들이 너도나도 발행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다.
올해 얼어붙은 투심은 수요예측 결과에 나타났다. 1분기 내 SK에코플랜트(A-), 울산지피에스(AA-), SK어드밴스드(A), CJ프레쉬웨이(A) 등 대기업 계열사들도 미매각을 이어갔다. ‘AA’ 등급의 미래에셋자산운용도 공모채 수요예측에서 미매각을 기록했다.여수공장에서 폭발사고가 난 여천NCC(A+)는 수요예측에서 전량 미매각이 발생했다. 지난해 1분기에는 미매각이 없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시장이 부진한 점도 크지만, 업종이나 개별 기업 이슈 따라, 비우량 등급 위주로 미매각이 발생했다는 분석이다.
힘든 1분기를 보냈는데 올해는 전반적으로 회사채 시장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SK네트웍스, 롯데렌탈, 롯데칠성음료 등 대기업 계열사들이 2분기 발행을 준비하고 있지만 변수가 계속되면서 조달 계획을 세우는 대기업들의 고민도 높다고 전해진다.
한 증권사 크레딧 연구원은 “단순히 금리 이슈만 보면 금리인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불확실성이 해소되면 크레딧 스프레드도 가라앉는 국면이 나타나겠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터지면서 변수가 복잡다단해졌다”며 “1분기 지나고 하반기엔 시장 안정화가 가능하다고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현 상황으로서는 스프레드를 축소할 재료가 많지는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금리 인상과 전쟁까지 외생변수가 큰데 지난해 하반기부터 시작된 한전의 대규모 발행이 올해도 이어지고 있어 국내 채권 시장에 수급 부담을 더해가고 있다. 올해 들어 발행은 더 늘었다. 한전이 올해 1분기 발행한 회사채는 9조6700억원으로, 지난해 1년(6~12월) 전체 발행규모(10조4300억원)에 육박하는 수치다. 2020년(3조5200억원)과 비교하면 3배 수준이다.
조달 금리도 급증했다. 지난해 7월 발행한 한전의 10년 만기 회사채 금리는 2.20% 수준이었지만, 연말엔 2.60%까지 뛰었다. 올해 2월 발행한 10년 만기 회사채는 금리가 3.17%로 더 뛰었다. 저평가로 한전채 몸값이 떨어지며 채권 투자자들 사이에선 “이러다 카드채 가격 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한동안 국내 채권시장에서 한전채 이슈는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4월 한전의 전력채 발행계획은 3월 발행량(2조4700억원)과 비슷한 수준이다. 시장 금리 레벨과 자금조달 상황을 고려해 탄력적으로 실시할 예정이지만, 발행규모가 크게 줄어들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전은 29일 2분기 전기요금에 적용될 연료비 조정단가도 ㎾h(킬로와트시)당 '0원'으로 동결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올해 들어 석탄·액화천연가스(LNG) 등 발전원료 가격이 크게 뛰었지만 정부의 통제로 전기요금엔 전혀 반영되지 못하게 됐다.
동결 배경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측은 “전기 요금은 민생 문제”라는 입장을 밝혔다. 예고된 대로 전력량 요금과 기후환경요금은 4월부터 소폭 인상되지만, 적자 규모를 줄이기엔 부족하다. 한국전력의 올해 적자 규모는 ‘역대 최대’였던 지난해(5조8601억원)보다 증가할 전망이다. 시장에선 올해 한전의 영업적자가 20조원을 넘길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한전채의 등급 하향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지만 공사채 등급에는 정부의 지원가능성, 민영화 가능성 등이 영향이 더 크기 때문에 등급 변동을 우려할 상황이라고 보긴 어렵다. 윤석열 정부에서 ‘원전 재평가’가 실행되며 적자 상황이 일부 만회가 되고, ESG투자에서 배제됐던 원전 등 발전채 투자 기준이 완화되면 전반적인 발전채 투심이 나아질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한전의 발전 자회사들도 친환경 신사업 전환을 위한 조달을 이어갈 것으로 보이는데, 당장은 투자 부담이 있어도 장기적인 성장성 측면에서는 긍정적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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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자금조달이 급감한 가운데 채권시장 ‘빅이슈어’인 롯데, SK, 한화는 앞단에서 발행을 이어갔다. 1분기 총 1조7000억원 규모를 발행하며 롯데그룹이 선두에 나섰다. 롯데지주, 호텔롯데, 롯데렌탈, 롯데제과, 롯데푸드, 롯데케미칼 등 다수의 계열사가 발행을 했다. 롯데그룹은 최근 지주를 비롯해 공격적인 투자 및 확장을 예고한 상태다. 롯데렌탈은 이달 1800억원을 투자해 쏘카 3대 주주에 올랐고, 롯데지주는 700억원을 출자해 ‘롯데헬스케어’를 설립하기도 했다. 롯데그룹은 서울 양평동 롯데제과 영등포공장을 미국 뉴욕의 첼시마켓과 같은 쇼핑몰로 개발해 ‘한국판 첼시마켓’을 만들겠다는 구상도 내놓았다.
2월 롯데쇼핑의 ‘AA-‘로의 등급 하향이 있었지만 타 계열사 등 그룹의 발행 자체에는 영향이 미미했다. 롯데쇼핑의 등급강등은 예상된 이벤트이기 때문에 이미 유통금리에 하향 가능성이 반영돼왔다. 한 채권시장 관계자는 “과거 롯데그룹 내 롯데쇼핑 의존도가 높았고, 이 때문에 투자자들 사이에에서 롯데쇼핑이 떨어지면 롯데 전반이 기운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최근 보면 그룹 내 캐시카우가 롯데케미칼도 있고, 계열사들이 각자도생하는 식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다만 핵심 계열사의 등급이 하락하고 그룹의 신성장동력이 모호하단 측면에서 그룹을 주시하고 있는 투자자도 많은 분위기다. 다른 채권시장 관계자는 “롯데가 여전히 빅이슈어이긴 하지만 시장 내 인기가 과거만큼은 못하다”며 “금리 메리트도 많이 떨어져 재무적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2022년 1분기 전체 채권발행시장(DCM) 주관은 KB증권이 선두를 달렸다. 일반회사채 주관에서는 키움증권이 CJ제일제당, SK매직 발행 주관에 참여하며 6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4위였던 SK증권은 7위로 올해를 시작했는데, SK인천석유화학과 SK실트론 등 SK그룹 계열사 발행 주관을 이어갔다. ABS 주관은 SK증권이 1위를 기록했고 신한금융투자, 한국투자증권이 뒤를 이었다.
지난해까지 전체 주관과 인수에서 순위권에 들던 산업은행은 전체 주관과 인수 모두에서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지난해 12월 정부가 SPV(기업유동성기구)의 저신용 회사채 CP(기업어음) 매입기간을 예정대로 지난해 말 종료하면서 회사채 인수 및 주관이 감소했다. 정부는 시장 변동성 확대 가능성을 감안해 시장상황 악화시 SPV가 매입을 재개할 수 있도록 비상기구로 전환해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