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우려 가득한데 기름 붓는 듯한 경영진 발언
설계·공정·세트 모두 참전…삼성전자 '구조적 한계'
빅테크 가세로 판 바뀌며 고객과 경쟁 구도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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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MC가 생산한 퀄컴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가 삼성전자의 경우처럼 발열 문제를 보인다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사업에 면죄부가 주어질까. 파운드리 사업부의 낮은 수율을 잡으면 고객사 확보에서 우위에 올라설 수 있을까. 시스템LSI가 애플의 M1 같은 칩을 설계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갤럭시가 아이폰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하나같이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삼성전자의 미래 경쟁력을 두고 지금처럼 어두운 전망이 득세했던 때를 찾기 어렵다. 호실적에도 불구하고 연신 최저가를 기록한 주가는 이 같은 시장의 인식을 잔뜩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1분기 잠정실적이 발표된 다음 날인 8일 삼성전자 주가는 연저점을 기록했다.
최근 갤럭시 '게임 최적화 서비스(GOS)' 사태는 일시적 사고보단 삼성전자 내부 불협화음의 한 단면으로 비치고 있다.
갤럭시 시리즈는 삼성전자의 독자 생태계 구축을 위한 첨병에 속한다. 종합 전자기업으로서 삼성전자의 수많은 기술을 담아내는 그릇이자, 고객 경험의 출발점이다. GOS 사태로 고객 경험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소프트웨어(SW)로 성능을 눌러놓고 고가 제품으로 판매했다는 기만 혐의까지 더하면 경영진의 윤리적 책임까지 거론될 수 있는 문제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삼성전자의 반도체 경쟁력 문제도 걸려 있다. 갤럭시S22에는 삼성전자 시스템LSI의 AP 엑시노스2200과 퀄컴의 스냅드래곤8 1세대가 탑재됐다. 둘 다 파운드리 사업부 4나노미터(nm) 최신 공정으로 생산됐다. 엑시노스냐 스냅드래곤이냐를 떠나 갤럭시S22는 설계와 공정에서 삼성전자의 기술력을 상징한다. 결과적으로는 전작을 포함한 다수 갤럭시 시리즈가 성능 측정 벤치마크에서 줄줄이 퇴출됐다.
퀄컴 AP의 설계 문제가 발열의 원인이었고, 그래서 MX사업부가 GOS를 적용했다 하더라도 삼성전자엔 어떤 면죄부도 주어지기 어렵다는 얘기다.
경쟁사 TSMC가 만드는 퀄컴의 차세대 AP가 발열 증상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시스템LSI의 설계 역량과 별개 문제다. 설령 TSMC가 시스템LSI의 AP를 생산했는데 발열이 여전하다 해도 파운드리 사업부의 낮은 수율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 관련 업계에서도 GOS 사태의 책임 소재는 어느 한 사업부에서 찾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높다. 설계와 공정, 세트 사업이 복합적으로 드러난 결과에 가깝기 때문이다.
설계 문제냐 수율 문제냐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것은 삼성전자의 비메모리 1등 전략에 보탬이 되기 어렵다. 그래서 연초 불거졌던 시스템LSI와 파운드리 사업부 간 책임공방 얘기는 여전히 시장 우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삼성전자 경영진의 발언은 이 같은 우려에 기름을 붓는 모습이다.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은 주주총회장에서 "고객 목소리를 다양하게 반영할 수 있게 귀 기울이겠다"며 고개를 숙였지만 사실상 변명이라는 박한 평가가 대부분이다. 증권사 반도체 담당 한 연구원은 "GOS 사태를 고객 요구를 오해한 결과로 축소하려는 듯했다. 굉장히 안일한 태도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갤럭시 시리즈 논란에도 주총에서 압도적 찬성률로 사내이사에 선임된 노태문 모바일경험(MX) 사업부장의 최근 발언에 대해서도 회의적 반응이 대다수다. 노태문 사장은 지난달 삼성전자 직원과의 대화에서 갤럭시 시리즈에 최적화한 자체 AP 개발을 고민해 보겠다고 발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전자는 이미 수년 전 독자 중앙처리장치(CPU) 코어 개발을 위해 프로젝트 '몽구스'를 추진하다가 중단한 바 있다. 현재 엑시노스 시리즈의 CPU는 종전처럼 ARM 코어 IP로 설계하고 그래픽처리장치(GPU)에선 AMD와 협력하고 있다. 당시 관련 업계에선 설계보다 공정을 담당하는 파운드리 사업에 집중하기 위한 조치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GOS 사태의 책임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노태문 사장이 자체 AP 개발을 언급한 것이다. 로직 반도체인 AP 개발과 같은 중대한 프로젝트는 경계현 DS부문장이나 박용인 시스템LSI 사업부장이 맡고 있다. 삼성전자의 새 리더십과 의사결정 구조에 대한 의구심으로 이어질 소지가 다분하다.
투자 업계 한 관계자는 "지난해 M&A 예고 발언 이후로 삼성전자 경영진이 '무엇을 하겠다'란 식으로 공수표를 던지는 일이 늘어났다"라며 "이제 와서 주주와 소통을 강화하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 준비된 발언인지 불분명해 예전 삼성전자 같지 않다는 시각에 자꾸 힘이 실리고 있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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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을 너무 넓게 펼쳐놨다 보니 각 전장에서 승부를 봐야 하는 삼성전자가 구조적 한계에 달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반도체 설계와 공정, 판매부터 가전과 같은 전방 세트 사업까지 모두 삼성전자가 속한 전장인데, 삼성전자가 제시한 목표는 '1등'이다.
노태문 사장의 자체 AP 개발 얘기는 MX 부문 수장으로서 당연한 발언으로 볼 수도 있다. 갤럭시만의 독자 생태계 구축을 위해 자체 칩을 기반으로 스마트폰 외 다른 기기까지 저변을 넓히는 방식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경쟁사 애플은 M1 칩을 통해 경쟁을 거의 끝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애플의 사업 모델은 직접 설계한 통합반도체(SoC)와 독자 운영체제(OS)에 구독형 서비스 SW 상품까지 모두 내재화하는 것이다. 스마트폰, 태블릿, 랩톱, 데스크톱에 웨어러블 기기까지 일종의 '가두리 양식장'을 구축했는데 충성 고객이 수억명 단위다. 메타버스 트렌드로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할수록 애플 생태계의 파괴력도 커질 것이란 전망이다.
삼성전자도 지난해 말 세트 사업을 통합한 DX 부문을 출범시켰다. 스마트폰 이후 기기 시장에서 독자 생태계 구축에 힘을 싣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세트 사업만 따로 놓고 보면 두뇌에 해당하는 자체 칩을 개발하겠다는 얘기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이는 파운드리 사업부의 고객에 대한 위협이기도 하다.
애플을 포함한 빅테크가 직접 반도체를 설계하는 경향은 더욱 짙어지고 있다. 엔비디아의 ARM 인수에 이들 대부분이 반대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빅테크들이 반도체 설계부터 운영체제, 하드웨어(HW)까지 모든 역량을 내재화하고 경쟁사가 진입할 수 없는 생태계를 구축하는데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애플조차도 전기차가 없으면 테슬라에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다고 노심초사하고 있다고 한다. 테슬라는 전기차뿐 아니라 자체 칩을 기반으로 슈퍼컴퓨터와 인공지능(AI) 기술까지 모두 내재화했다. 완전자율주행(FSD) 개발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테슬라 시가총액이 애플을 앞설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전기차가 없는 애플 입장에서는 대응이 불가능하다는 평까지 나온다.
자율주행 전기차 외에도 로봇, AI용 프로세서, 메타버스까지 빅테크를 중심으로 비슷한 전쟁은 지속될 전망이다. 각각 목적에 따라 필요 반도체를 설계해 파운드리를 찾게 될 텐데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 입장에선 고객사가 된다. 반면 시스템LSI와 세트 사업에는 위협적인 경쟁사들이다.
애플이 TSMC를 택한 이후로 시스템LSI가 파운드리와 한 지붕 아래 있는 데 대한 우려는 꾸준히 제기돼왔다. 이제는 고객과 경쟁하는 구도가 애플, 퀄컴을 넘어 빅테크 전반으로 확산하는 모양새가 됐다.
증권사 반도체 담당 한 연구원은 "빅테크가 인텔이나 엔비디아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이 TSMC나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인데, '모두 내재화' 경향 속에서도 파운드리만큼은 대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며 "반도체 설계와 세트 사업에 힘이 실리게 될 경우 파운드리 고객 유치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큰데, 그렇다고 설계와 세트 사업을 이대로 두면 주도권을 놓치게 되는 구도로 흘러가고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