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만' 쏟아내는 IPO…핵심 동력은 '제값 받아와라' 주문
파이낸셜 스토리 계획 맞춘 듯…11번가도 상장 절차 착수
투자 회수·모기업 주가 부양 위한 IPO 두고 우려도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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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그룹 계열사의 무더기 기업공개(IPO)가 앞으로 수년 뒤까지 빽빽하게 예고됐다. 시장에서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룹 '파이낸셜 스토리' 아래 작전하듯 몰아치는 탓에 걱정 섞인 목소리도 덩달아 늘어나고 있다.
상장 후보군 중에선 내실이 불투명하단 평가를 받는 기업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목표 가치는 모두 조 단위다. 모회사 시가총액을 띄우거나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한 용도로 비치다 보니 시장의 피로감도 상당한 모양새다.
오는 5월에는 SK스퀘어의 자회사 SK쉴더스와 원스토어의 기관 수요예측이 일주일 간격으로 돌아온다. 금리는 오르고 공모시장 투심도 가라앉고 있는 터에 한 지붕 아래 두 회사 IPO가 몰리는 게 유독 도드라진다. 각각 재무적 투자자(FI)와의 계약에 따라 이례적으로 일정이 빡빡하게 물리는 듯하지만 양사 외에도 IPO 트랙 위에 오른 계열사가 많다.
SK스퀘어 아래에서만 11번가와 콘텐츠웨이브, 티맵모빌리티 등이 예비 주자로 꼽힌다. 지난해 수차례 인수합병(M&A)에 나섰던 SK에코플랜트는 연초 상장 전 투자유치(프리 IPO)를 마치자마자 내년 상장을 목표로 내처 주관사까지 뽑았다. 프리 IPO 중인 SK온을 포함하면 SK그룹은 2025년까지 공모 시장 단골 자리를 꿰찰 전망이다.
이미 후보군이 쟁쟁한데, 지난 21일엔 11번가까지 상장 주관사 선정 절차에 나서며 순번대기표를 뽑았다. 이르면 2023년 상장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경우 2020년 이후 SK그룹 신규 상장사만 10곳에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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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일감이 풍족해진 투자업계에서도 걱정스럽다는 목소리가 새나온다. 이 모든 작업이 지주사가 제값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오너 판단에서 출발한 것처럼 보인다는 얘기다.
SK그룹 계열사 투자 설명회(IR)에선 "제값을 받지 못하고 있다"라거나 "지나치게 할인돼 있다"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이나 박정호 SK스퀘어 대표 등 그룹 내 핵심 인사들이 주요 화자다. SK스퀘어는 자사 홈페이지에 연말 기준 주가와 함께 순자산가치(NAV) 대비 할인율을 걸어두고 있다. 본질에 비해 싸단 얘긴데 어떻게든 제값을 찾아가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상장사가 투자자를 위해 주가 부양에 나서는 걸 문제 삼는 목소리는 없다. 그러나 주주 가치 극대화를 위해서라면 구태여 중복 상장을 남발하는 것이 맞느냐는 의문이 적지 않다. 증시도 부진하고 대선도 마무리되며 잡음이 줄어들긴 했지만 모자회사 동시 상장으로 인한 소액주주 피해 문제는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는 불씨다. SK그룹 내부에서도 주요 계열사 상장이 규제에 가로막힐까 연초 정치권 동향을 예의주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대선이 끝나자마자 몰아치듯 상장 작업을 밀어내고 있다.
결국 지주사 SK㈜를 정점으로 각 계열로 뻗친 파이낸셜 스토리가 핵심 배경이 아니겠느냐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SK㈜는 지난해 파이낸셜 스토리를 통해 2025년까지 시가총액을 140조원 규모로 키우겠다고 약속했다. 지주사 아래 자회사·손자회사까지 상장시켜 투자 전문회사인 SK㈜ 기업 가치에 알뜰하게 반영시키겠다는 얘기다. 거슬러 올라가면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있다. 지난 2017년 '딥 체인지 2.0'을 제시하며 계열사 사장단 경영평가(KPI)에 주가 부양을 반영한 걸 파이낸셜 스토리의 발단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당시에도 SK㈜ 가치를 100조원으로 키우겠다는 이야기가 함께였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연초만 해도 대선 결과와 무관하게 중복 상장을 통한 주가 부양이 앞으로 힘들어질 거라 보는 시각이 많았다. SK그룹 파이낸셜 스토리를 제고해야 할 거란 말도 나왔다"라며 "지금 보이는 모습은 지주사 할인율을 신경 쓰지 않고 NAV를 더 가파르게 키우기만 하면 어차피 모회사 주가에, 최종적으로는 SK㈜ 주가에 반영될 거라는 계산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대기업 알짜 사업을 증시에 상장하는 것이 투자자에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SK그룹 내 IPO 대기 주자 중 SK온을 제외하면 주가가 오른 뒤 쪼개기 상장에 나선 사례는 없다. 증시 호황을 틈타 시장에서 손쉽게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거래와는 거리가 있다는 얘기다. 상장을 통해 발행사와 모회사에 대규모 현금이 유입되고 이를 재투자하는 선순환 구조라면 주주 가치 확대에 분명 도움이 된다.
그러나 목표 숫자를 정해두고 여기에 짜 맞추려는 듯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알짜 기업의 주인 될 기회를 공개 모집하는 것과 투자금 회수 또는 모회사 주가 부양을 위해 비싸게 상장시키는 건 별개란 얘기다.
지금 트랙에 오른 IPO 대기 주자들을 과연 알짜 회사로 볼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투자은행(IB) 업계 한 관계자는 "원스토어와 11번가의 상장을 추진한다는데 주변에서 사용하는 사람이 안 보이는 플랫폼을 어떻게 상장시키겠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라며 "투자 유치를 통해 연명하던 플랫폼이 상장을 한다는 건 마지막 폭탄을 공모 시장에 돌리고 기존 투자자 회수 길을 찾아주겠다는 뜻 아니냐"라고 말했다.
지난해 SK텔레콤이 인적분할을 앞둔 시점에도 이 같은 이야기가 종종 시장에서 회자했다. 분할 이후 비통신 신사업 자회사 대부분은 SK스퀘어 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SK텔레콤이 박탈감을 느낄 법도 한데, SK하이닉스를 제외하면 SK스퀘어가 오히려 혹을 달고 갔다는 평도 있었다. SK텔레콤은 다시 비통신 신사업 육성 실험에 들어가면 그만이나, SK스퀘어 경영진은 목표 가치에 맞춰 상장을 성공시켜야 하는 숙제를 마주하게 된 탓이다.
증권사 한 관계자는 "그룹 차원에서 11번가는 몇조, 원스토어는 몇조, 이런 식으로 상장 시점 목표 가치를 이미 정해두었다는 얘기가 나왔다"라며 "경영진 차원에서는 자리보전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상장 작업을 완수해야 하다 보니 중압감이 상당한 것으로 전해진다"라고 전했다.
목표 기업 가치를 맞추기 위한 작업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지난 2년 시장은 수많은 공모 기업을 통해 이들이 고평가를 이끌어내는 여러 기법을 압축적으로 경험했다. ▲공모가 산정을 위한 비교 기업군을 무리하게 선정하거나 ▲증권신고서 제출 시점에 맞춰 매출액과 같은 핵심 지표만 끌어올리는 등 방식이다. 지금은 규제당국에 수시로 가로막히고 있지만, 실제 가치 이상의 공모자금을 수확한 사례도 많다. 물론 주가에 낀 거품은 수개월 내 날아가 버렸다.
SK그룹 IPO 후보군 사이에서 이 같은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평이다. ▲M&A나 합병을 통해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고 ▲해외 매출을 키우기 위한 청사진을 공표한 뒤 ▲매출액을 바짝 끌어올리는 전략이다. 국내 경쟁사에 적용되는 멀티플(기업 가치 배수)로는 목표 기업 가치를 맞추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풀이된다.
사업부 분할·합병·매각 및 M&A를 거친 SK에코플랜트와 SK쉴더스는 해외 경쟁사를 비교 기업군으로 맞이할 준비를 거의 갖췄다는 평가가 나온다. 경쟁사보다 시장 점유율이나 실적과 같은 객관적 지표가 부진하더라도 비교 기업군 선택지가 늘어나면 더 높은 기업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증권사 투자금융부 한 관계자는 "SK그룹 계열사와 관련해 단기간 내 수차례 자금 요청이 온 적이 있는데 서로 다른 M&A에 관한 건이었다"라며 "사업을 키우기 위한 목적이라면 문제 될 게 없지만 IPO를 위해서라면 순서가 거꾸로 된 것 아닌가. 저런 속도라면 M&A 이후 관리가 가능할까 걱정이 들었다"라고 전했다.
대부분 지주사가 오너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주가 관리를 등한시한다는 비판을 고려하면 SK그룹의 파이낸셜 스토리가 다른 대기업에 모범이 된다는 평도 많다. IPO를 앞둔 SK그룹 계열사의 전략은 그간 다른 많은 기업이 취해온 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단일 그룹 내에서 누적되는 것이 불안하다는 목소리는 늘어나고 있다.
M&A 업계 한 관계자는 "시장에서 보자면 SK그룹 일감이 쏟아지는 것이 아쉬울 일이 없지만 경고음도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며 "모두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진다면 좋겠지만 이러다 문제가 생길 수 있겠다는 목소리도 많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