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워싱 논란에 ESG 회의론도 부상
과도기 온 ESG에 국내시장도 '혼란'
투자자들, 다시 '거버넌스'에 관심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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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코로나 팬데믹에 맞물렸던, 전 세계적인 ESG(환경·사회·거버넌스) 광풍이 주춤하고 있다. 엔데믹 기조와 전쟁, 에너지 수급난에 연이은 ‘그린워싱’ 논란까지 겹치며 글로벌 시장에선 ESG 회의론까지 떠올랐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즈(FT)는 6일 ‘ESG투자는 어떻게 심판대에 서게 됐나(How ESG investing came to a reckoning)’ 제목의 기사에서 "ESG 용어는 종말에 다가가고 있는지 모른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비교적 ‘ESG 새내기’인 한국 시장도 팬데믹 시작과 함께 시작된 ESG 열풍이 빠르게 꺾인 분위기다. ESG 펀드와 채권의 인기는 식었고 투자자들은 다시금 G(거버넌스)에 집중하고 있다. 대주주 중심의 ‘한국식 지배구조’ 아래에서는 이상적인 ESG 투자의 실현은 쉽지 않다는 우려는 여전하다.
엔데믹·전쟁에…'기죽은' 글로벌 ESG 투자
올해 들어 펀드, 채권 ·대출 등 전반적인 ESG 투자의 글로벌 둔화세는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실제 ESG 시장으로의 자금유입이 큰 폭으로 줄었다. 올해 1분기 글로벌 ESG펀드 자금 유입액은 지난해 4분기(1425억달러)의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다. 3월 유입액은 2020년 3월 이후 최저치(150억달러)다. 전체 주식펀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20년 2월~2021년 1월 35%까지 달했지만, 올해 3월 21%로 감소했다. 5월에는 ESG ETF가 2020년초 이후 처음으로 유출 전환한 주간도 나타났다.
각광받던 ESG가 ‘수익률 복병’이 되자 투자자들은 쉬이 등을 돌렸다. 국내 공모펀드 중 ESG 주식형·채권형 모두 올해 들어 수익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금리인상, 인플레이션 등으로 기술주와 성장주 주가가 하락한 탓이 크다. 국내외 ESG펀드들은 주로 IT·헬스케어·친환경 관련 성장주들을 담고 있다. 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나 방산업종 주가가 상승한 점도 수익률 부진에 영향을 미쳤다. 에너지 익스포저가 낮은 친환경 자산들은 특히 수익률이 부진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ESG 중 ‘환경’을 포기하는 투자자들도 나타났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과 뱅가드는 지난달 각각 ‘전략 수정’을 발표했다. 뱅가드는 "화석연료 프로젝트에 새로운 투자를 금지하는 정책을 끝내겠다"고 선언했고, 블랙록은 "기후변화 대처를 요구하는 로비스트들이 주총에서 새로운 석유 가스 생산에 대한 투자금지를 추구하면,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엔 영국 은행 HSBC홀딩스의 HSBC자산운용에서 투자를 담당하는 고위 임원이 "기후변화에 따른 금융 위험이 지나치게 과장됐다"고 발언했다가 직무 정지를 받은 해프닝(?)도 있었다.
채권 시장의 ESG 열기도 예년같지 않다.
지난해 국내 채권 시장에선 ESG가 단연 화두였다. 대기업들은 연이어 녹색 채권을 발행하며 ESG 행보를 홍보했다. ESG 경영을 선포한 금융사들 등 ‘큰 손’들은 열심히 ESG채권을 담기 시작했다.
올해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투자자들이 ESG 요소를 고려하는 추세는 자리잡았지만 ESG채권을 향한 관심 자체는 한 풀 꺾였다. 올해 1분기 국내 ESG채권 발행은 전년동기에 비해 크게 감소했다. 에너지 수급교란에 따른 관심 감소로 지난해 하반기부터 분위기는 좋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채권시장의 전반적인 수요 위축 영향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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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워싱 홍역 치르는 'ESG 우등생'들
시장에선 너도나도 ‘광고한’ ESG의 신빙성에 대한 의문도 커졌다. 20년 전부터 ESG 투자가 시작된 선진국에선 연이은 그린워싱(실제로는 친환경적이지 않지만 마치 친환경적인 것처럼 홍보하는 '위장환경주의') 이슈가 터지며 칼바람이 불고 있다.
최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투자업체의 그린워싱을 규제한 첫 사례가 나왔다. 지난달 23일 SEC는 BNY멜론 투자자문에 벌금 150만달러(약 19억원)를 부과했다. 운용 중인 뮤추얼펀드의 ESG 투자 지표를 허위 기재했다는 이유에서다. 해당 투자자문사는 2018년 7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고객들에게 “펀드 내 모든 투자가 ESG 검토를 거쳤다”고 안내했지만 SEC는 일부 투자에 품질 검토가 누락되거나 왜곡됐다고 파악했다.
그린워싱 논란은 경영진 사퇴까지 이어졌다. 지난 1일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중 하나인 독일 DWS의 아소카 뵈르만 CEO는 그린워싱 논란이 커지자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DWS그룹은 ESG 투자를 대대적으로 내세웠는데, 홍보와 달리 운용 자산의 절반에 달하는 4590억달러(613조원) 규모의 펀드가 ESG 요인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DWS 전 지속가능경영 책임자의 내부고발로 SEC와 독일 금융당국이 지난해 9월 조사에 착수했고, 이달 초 독일 검찰이 DWS그룹의 대주주인 독일 도이체방크의 본사를 압수수색하는 등 고강도 수사가 이어지고 있다.
글로벌 투자운용사 뱅가드는 최근 ESG를 붙인 펀드가 메타 등 기술주에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그린워싱 비판을 받았다. JP모간체이스도 화석연료 업계에 지원한 대출 규모가 지난해 617억달러로 전년 동기(518억달러) 대비 99억달러가 늘었다고 알려지자 거센 비판을 받았다.
ESG 금융시장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선진국에서 부실이 드러나자 글로벌 시장 전체로 긴장감이 번지는 분위기다. 현재 전세계의 약 6000여개 ESG펀드 중 유럽과 미국이 그 85%를 운용하고 있다.
한 ESG평가업계 관계자는 “해외에서 그린워싱 이슈가 먼저 터지면서 국내에서는 오히려 경각심이 커졌다”며 “ESG채권 등 ‘돈에는 꼬리표가 없다’는 우려가 있는데, 해외 사례를 통해 나중에 ‘허위’가 드러났을 때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이 확인되니까 기업들이 자금 사용 내역을 철저히 공개하는 등 신경을 쓰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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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돌아 지배구조…"G없이는 E·S도 소용없다"
ESG 열풍이 휩쓸고 간 지금, 국내 투자자들 사이에선 ‘이게 문제가 아니다’란 인식이 커졌다. 물론 친환경 등 세계적인 흐름을 거스르는 건 안되지만, “E와 S를 챙긴다고 주가가 오르는게 아니다”는 것이다. 결국 ESG 투자의 핵심이 지배구조 이슈로 귀결되는 분위기다.
코로나 이전 국내에선 ESG 논의는 대부분 지배구조에 치우쳐 있었다. 재벌이란 특수한 구조가 항상 ‘뜨거운 감자’였다. 거버넌스가 ESG 차원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도 2019년쯤부터다. 그러다 2020년 초반부터 팬데믹을 겪으며 ‘환경’이 급부상했다. 정책적인 영향도 컸다. 2020년 ‘한국판 뉴딜’이 발표되면서 친환경을 내세운 자금조달이나 투자를 둘러싼 분위기도 고조됐다.
엔데믹, 정권 교체로 다시 ‘G’가 투자자들의 최대 관심사로 돌아왔다. 탄소중립 등 친환경이 ‘방향’은 맞지만 속도조절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도 형성됐다. 물론 리스크 관리 차원의 E와 S의 중요성은 여전하다. 해외 석유업체 등 환경 이슈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기업의 존립이 위태롭다는 사례도 확인했다. 인종차별, 성추문, 갑질 등 사회적인 이슈도 평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만 시장에선 ‘E’와 ‘S’도 결국엔 ‘G’가 핵심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환경과 사회 요소와 관련한 실행력 자체가 거버넌스에서 나오기 때문에 ‘G’가 담보되지 않으면 ‘E’와 ‘S’도 요원하다는 것이다.
정해진 기간에 성과를 내야하는 투자업계에서는 더욱 ‘G’로 초점이 모이는 분위기다. 기업의 ESG경영은 장기적인 호흡이지만, 수익을 내야 하는 투자업계에서는 거버넌스 수준의 변화가 아니면 ESG 투자의 실효성이 높지 않다는 것이다. 투자자들이 ESG를 내세우는건 광고 효과와 더불어 리스크 관리 차원이 큰데, 어쨌든 결과적으로 ESG 펀드 수익률을 끌어올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 ESG투자는 ‘가성비’가 그리 좋지 않다. 선진국에서 투자에서 G를 고려하는 수준은 이사회의 다양성과 같은 선진적 거버넌스 차원이다. 환경, 사회적 책임과 더불어 해당 부분들이 지켜지지 않은 곳들을 투자에서 배제하면 수익률도 좋고, ESG가 고려된 투자라는 식이다. 반면 국내에서의 ‘G’는 유럽, 미국 등에서 고려하는 내용과 달라 수익 개선으로 바로 이어지지 않는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은 소수의 지분을 든 대주주가 주가를 누르거나 배당을 하지 않는 것들을 희석하기 위해 ‘ESG 선진기업’과 같은 용어를 내건다”며 “기본적으로 대주주 이슈 등 더 넓은 차원의 거버넌스 이슈가 해결되지 않으면 전반적인 ESG를 관리한다고 주가가 오르진 않는다”고 말했다.
올해 주주총회에서 주요 행동주의 펀드들이 ‘ESG 전략’ 차원에서 지배구조의 근본적인 체질 변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실질적으로는 ‘ESG’ 전반보다는 대주주 중심 거버넌스 해소 요구다.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이 SM엔터테인먼트에 감사 선임안을 낸 것, 차파트너자산운용이 사조오양에 이사회 견제를 위한 감사 선임안을 내고 토비스에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한 것, 안다자산운용이 SK케미칼에 주주제안을 한 것 등이 같은 맥락이다. VIP자산운용이 아세아와 아세아시멘트에 배당확대와 자사주 매입소각 등을 제안하며 주주행동을 한 것도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는 차원으로 해석된다.
어쨌든 ESG 투자가 흐름이기 때문에 ESG를 내건 주주 활동을 준비하는 투자업체는 늘어나는 분위기다. 리서치 등 관련 업무를 할 인력 영입 활동도 활발하다.
하지만 국내 시장에서 'ESG 투자→기업 ESG 개선→주가 부양'까지 이어지는 선순환을 실현하기는 갈 길이 멀다. 기업 입장에서도 주식의 분산, 최대주주의 대표이사 겸직 수준을 넘는 지배구조 변화는 오너의 경영권 행사와 연결돼있어 해결이 쉽지 않다. 투자자 입장에서도 지배구조 차원에서 주가 ‘디스카운트’가 있는 회사들은 많지만, 그 중 의미있게 회사를 바꿔 주가를 부양할 기업은 많지 않다는 평이다. “이사회 자체가 대주주 위주고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데” 선진 거버넌스를 통한 주가부양까지는 먼 일이라는 설명이다.
경영 참여형 펀드가 가장 직접적인 공격이겠지만, 사실상 성공 사례는 드물다. KCGI-한진칼의 경영권 분쟁도 KCGI가 지분을 매각하며 일단락됐다. 국내 시장에서 지분경쟁 등 실제 투자자들이 ‘공격 할만한’ 상황 자체도 거의 없다. 오히려 투자자들은 KCGI 사례를 보면서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부 PEF(사모펀드) 운용사는 지배력이 취약한 대기업 오너 쪽과 손잡고 펀드를 만들어 방어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다만 ‘지배구조 방어’ 펀드도 수요가 많지는 않다. 공격이 없으니 방어할 일도 많지 않다.
한 PEF 관계자는 “ESG 전에 근본적으로 한국형 지배구조 문제가 있어서 투입하는 것 대비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상황은 많지 않다”며 “국내 기업들이 ‘대주주만을 위해’ 일하는 곳들이 많은데, ESG 관리 요구를 하는 장기 기관투자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방향으로 간다면 ESG는 자연스럽게 이행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