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만 무성한 반도체 M&A…'WHY'가 빠진 ARM 공동인수설
입력 2022.06.14 07:00
    인텔·퀄컴·SK 이어 삼성까지 ARM 인수 가능성 거론
    가격 대비 실익 불투명한데…인수 목적까지 불확실
    ARM 자체 기술 가치 외 다른 이해관계로 접근 필요
    애플 등 경쟁사 견제 목적 '반도체 동맹' 가능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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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국내외 굵직한 반도체 기업들이 잇따라 ARM 인수 의지를 내비치면서 인수합병(M&A) 시장에 여러 시나리오가 돌고 있다. 그러나 핵심인 '왜' 인수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그림은 없다. 더군다나 인수 후보군 각각에 돌아갈 실익도 불투명하다는 평이 많다. 이 때문에 ARM 보유 자체 기술보다는 지정학적 이해관계나 애플과 같은 경쟁사 견제를 위한 연합전선 구축 목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잠재 매물로 나온 ARM은 반도체 시장 내 대형 M&A에 목마른 투자자들에게 '전가의 보도'처럼 비치고 있다.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그룹이 비싸게 인수했고, 엔비디아에 그보다 더 비싸게 매각하려다 올 초 반독점 규제와 경쟁사 견제로 무산됐다는 점에서 ARM의 위상에 상당한 거품이 낀 셈이다.

      컴퓨팅 시장에서 인텔 중앙처리장치(CPU)의 장기집권 시대를 저물게 했다는 점에서 ARM의 코어 설계자산(IP)의 위상은 여전히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M&A 전략 관점에서 보자면 벌어들이는 IP 라이선스 수익이나 자체 확장성에 비해 가격이 터무니없이 높다.

      엔비디아의 인수가 무산되며 소프트뱅크그룹은 약 600억달러(원화 약 76조원) 이상에 기업공개(IPO) 계획을 추진 중이다. ARM의 매출액이 2조원 안팎인 점을 고려하면 투자 회수(Exit) 목적으로 거품을 더 키워놨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이 같은 배경을 감안하면 ARM이 보유한 코어 IP 활용에 대한 청사진 없이는 그냥 유명하고 비싼 매물에 불과한 셈이다.

      우선 반도체 업계에선 소프트뱅크가 ARM을 비싸게 사고 나서 그 이상 가치로 키워냈다고 보는 시각이 별로 없다. 인수 당시보다 비싸게 사겠다는 주인을 찾을 때에만 성공한 투자 정도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당시 손정의 회장이 주목한 건 사물인터넷(IoT)의 성장이었는데, 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돈 되는 IoT 플랫폼을 구축한 기업을 꼽기 어렵다. 지난 2019년 아마존과 구글, 애플 등이 IoT 플랫폼 연합을 구축하려 했지만 이마저 흐지부지됐다. 모든 사물을 연결하는 생태계가 마련될 것이라는 방향성은 맞았지만 손정의가 주목한 IoT는 확고한 플랫폼을 기반으로 데이터를 축적하기까지의 선순환 구조에 닿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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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 통합반도체(SoC)나 주문형 반도체 산업은 시장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으로 커졌다. 스마트폰 시대 AP 경쟁에 이어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서버와 클라우드 등 기술 저변이 마련되자 ARM 코어 IP를 찾는 빅 테크가 우후죽순 등장하며 자연스럽게 위상이 높아진 것.

      엄밀히 말하면 손정의 회장이나 소프트뱅크가 기술 혁신을 주도했다기보다는 빅테크 간 주도권 경쟁이 만들어낸 혁신 수요에 ARM 보유 IP가 딱 맞아떨어진 덕에 가깝다. 시대가 바뀌며 ARM의 새로운 쓰임새가 조명된 것이니 ARM이 영업을 잘한 덕으로 보기도 어렵다. 오히려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TSMC나 삼성전자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서비스가 ARM의 숨겨진 후원자였단 평까지 나온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소프트뱅크가 ARM을 살 때도 너무 비싸게 샀다는 평가가 많았고, 새 주인이 될 뻔한 엔비디아도 사실은 고평가된 자사 주식을 활용해 소프트뱅크의 투자 차익을 맞춰주는 식으로 인수하려 했었다. 원래도 비쌌지만 더 비싸진 셈"이라며 "그래도 엔비디아의 경우 클라우드와 엣지 컴퓨팅 시대를 앞두고 자체 반도체 플랫폼을 구축하겠다는 청사진 자체는 시장에서 상당한 지지를 이끌어냈다"라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SK하이닉스와 퀄컴에 이어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접촉한 인텔까지 컨소시엄 형태로 ARM을 인수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왜 굳이 ARM을 공동지배해야 하는지에 대한 배경은 감을 잡기 어렵다. ARM이 보유한 설계 자산은 직접 반도체를 설계하겠다고 나선 빅테크 사이에서 이미 공동 자산처럼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퀄컴은 지난 수년 동안 ARM 코어 기반으로 AP를 설계해왔다. ARM 지분을 확보한다고 해서 AP 설계 역량을 대폭 끌어올리거나 새로운 응용처에 대응할 역량을 갑자기 갖추게 될 거란 분석은 잘 없다. 인텔의 경우 ARM과 시장을 양분하는 x86 진영의 맏형 격이다. M&A 추진 시 반독점 규제에서 가장 자유롭기 어려운 입장이다. 이들에 비하면 SK그룹은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단계라 사업적 시너지가 가장 불투명하다는 평이다.

      공동지배 형태로 반독점 심사를 우회하더라도 ARM의 자체 수익성을 끌어올리는 방법도 제한적이다. 업계에선 ARM 코어 IP 역시 RISC-V(리스크 파이브) 같은 대체 IP의 추격을 받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라이선스 수익을 끌어올릴 경우 시장의 반발과 점유율 하락이 불가피하다. 각각 파운드리 2, 3위이자 종합반도체기업(IDM)인 삼성전자와 인텔에 있어 업계 공동 자산을 선취하려는 시도는 잠재 고객을 대놓고 겁주는 행위로 볼 여지도 충분하다.

      이 때문에 M&A 전략이나 기술 확보 자체보다는 어느 정도 정치적 이해관계가 깔려 있는 것 아니냐는 시각에도 힘이 실린다. 개별 기업 차원에서도 가장 완성에 가까운 생태계를 구축한 애플 등 경쟁사 견제 차원에서 그나마 뜻이 일치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 이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한국과 일본을 연이어 방문하며 반도체를 위시한 미래 기술 산업에서 중국을 고립시키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있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 제조 부활 의지를 인텔에 투사하고 있는데, 경쟁 관계인 파운드리를 포함하더라도 삼성전자와 함께 한미 양국을 대표해 다방면으로 협력하는 것이 가능한 구도다.

      최근 애플이 새 반도체인 M2를 발표하고 운영체제(OS) 호환에 속도를 내고 있어 반도체와 빅 테크 업계 전반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완성차 업체가 테슬라에 대항하기 위해 빅테크와 공동 전선을 구축했듯이 애플이 독자 생태계의 진입장벽을 더 높게 쌓을수록 반도체 업체가 동맹을 꾀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결국 ARM을 구심점으로 여러 반도체 기업이 연합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시나리오가 등장한 것 아니겠냐는 얘기다.

      증권사 반도체 담당 한 연구원은 "다 같이 손정의 회장의 엑시트를 도와줄 게 아니라면 공동인수에 나서는 배경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라며 "삼성전자나 SK그룹과 같은 국내 기업이 거론되는 데 회의적인 반응도 있지만, ARM을 중심으로 연합을 구축하는 상징적 거래가 물밑에서 진행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