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배터리 마지막 비빌 곳…설비투자 줄일까 우려
몇달새 대기업 1000조 투자 수혜 기대감 꺾이는 분위기
2년간 소부장에 자리 편 기업·투자업계 힘든 시기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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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금리 인상과 경기 침체 우려가 배터리에 이어 반도체 산업으로 번지고 있다. 수혜를 기대하던 소재·부품·장비 업종 전망도 덩달아 시험대에 오를 전망이다. 대기업이 앞장서 수백조원을 쏟아붓는 만큼 하방이 단단할 것이라 내다봤지만, 중장기 전망을 내려잡는 분위기인 탓이다. 반도체와 배터리 성장성은 유지되겠지만 투자비 부담이 현실화하며 구조조정이 진행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7월 들어 반도체 시장에선 전방 고객사의 주문축소(오더컷)가 본격화하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기업 가치를 바닥까지 끌어내리고 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업황을 둘러싼 논쟁도 투자가들의 우려가 하나씩 맞아들어가며 승패가 갈리는 분위기다. 공급망 혼선은 여전한데 조달 비용은 오르고, 인력 부족에 임금 상승이 겹치며 증설 계획에 변화가 예고된다. 내년 빗그로스(비트 단위로 환산한 출하량 증가율)가 역대 최저를 기록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투자업계에선 상반기 끝자락에 접한 배터리 업계 소식과 겹쳐 보인다는 분위기다. 상반기 끝자락 LG에너지솔루션(LG엔솔)은 미국 애리조나 단독 공장 증설 계획을 재검토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시장에선 최근 배터리 업계 내에서 중장기 시장 수요를 낮춰 잡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가장 앞단에 있는 대기업이 수요 둔화를 이유로 설비투자를 보수적으로 진행할 경우 소부장 업체의 수혜 기대감도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시장에선 마지막 비빌 언덕까지 꺼져가고 있다는 걱정이 크다.
지난 2분기 들어 잇따라 플랫폼 기업 기업공개(IPO)가 벽에 가로막히자 투자 업계에서 대기업 설비투자(CAPEX)는 대안으로 부상했다.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에 발맞춰 관련 소부장 산업이 안정적으로 커나갈 수 있을 거라 내다본 것이다. 정권 교체와 함께 대기업이 1000조원 규모 투자 계획을 내놓기도 했다.
지난 4월 당시 투자은행(IB) 업계 한 관계자는 "지금 진행 중인 플랫폼 기업 IPO는 내부에서 이미 안 될 거라 마음을 먹은 상황이고, 이후로는 반도체나 배터리 소부장 쪽에서 자기자본 매매(PI) 위주로 대응할 것"이라며 "대기업 설비투자가 꺾이지만 않으면 안정적으로 숫자를 확인할 수 있는 업종 위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라고 전했다.
회계법인 등 인수합병(M&A) 자문 시장에서도 사모펀드(PEF)를 중심으로 관련 수요가 늘어나는 것으로 확인됐다. 올 들어 반도체 시장 설비투자 총액이 사상 최대 수준으로 불어났고 배터리 산업은 인프라 투자 성격이 짙어 어차피 집행해야 할 투자비쯤으로 받아들여진 탓이다.
상반기 말 이후 이 같은 분위기는 배터리, 반도체 순으로 차례로 흔들리고 있다.
배터리 산업의 경우 2025년까지 공급 부족이 전제로 받아들여져 왔다. 국내에서도 이미 3사 중 SK온을 제외한 LG엔솔과 삼성SDI가 흑자 구간에 접어들었고 증설 계획에 맞춰 시장 조달을 마친 터라 중장기 설비투자 계획에 변화가 없을 거란 기대감이 컸다. 그러나 원자재 가격 변동성과 전기차 기업의 시장 지배력 전망이 예상을 벗어나며 이 같은 전제가 깨지고 있다.
배터리 업계 한 관계자는 "전기차 시대 들어서 내연기관 시절 브랜드 가치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걱정이 큰데, 상반기 중국 브랜드의 점유율 상승과 현대차그룹의 약진도 근거 중 하나"라며 "합작법인(JV)을 통한 파트너십이 배터리사의 중장기 성장성을 뒷받침해왔는데, 지금은 누가 썩은 동아줄이 될까 걱정해야 할 판"이라고 전했다.
배터리 산업의 경우 주목도에 비해 수익성이 낮은 편에 속한다. 고객사인 전기차 기업 역시 판가 인상을 고객에 전가할 정도의 시장 지배력을 갖추지 못했다. 투자 계획 변경과 함께 마른 수건 쥐어짜듯 마진 압박이 본격화할 경우 협력 소부장 업체에 미칠 영향도 상당할 것으로 전망된다.
배터리에 비해 수익성이 높은 반도체 산업의 경우 소부장 산업 역시 효자로 꼽혀왔지만 이 역시 낙관하기 힘든 분위기다. M&A 시장 한 관계자는 "반도체의 경우 업황 변동성은 있어도 소수의 메이저 기업이 시장을 책임지는 구조라 투자에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라며 "밸류체인 곳곳에 알짜 기업이 숨어 있어 투자 기회가 많았는데 반도체 투자가 꺾인다면 그나마 비빌 언덕까지 사라지게 되는 셈"이라고 전했다.
지난 2년 동안 배터리와 반도체 시장에 몰리는 돈을 좇아 난립한 기업에 대한 교통정리가 진행될 거란 목소리도 늘었다. 소부장 관련 중소·중견 기업뿐 아니라 두산·롯데·GS·한화 등 대기업 그룹 역시 그간 밸류체인 곳곳에 자리를 펴왔다. 반도체나 배터리 산업 자체는 장기적으로 핵심 지위를 유지하겠지만 버텨내지 못하는 기업이 나타나기 시작할 거란 전망이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기업에 대한 투자 심리 자체가 위축됐고, 반도체나 배터리 산업 역시 중장기 전망에서 디테일한 오류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라며 "메이저 전기차 기업의 합종연횡 가능성이 거론되고 코스피에 상장한 소재 업체가 증설 목적 투자 유치에 실패하는 상황에서 뒤단에 늘어선 소부장 업체 역시 자금난이 심화하며 버티기 힘든 시기가 닥쳐올 수 있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