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상장 추진하며 증권신고서 한 번도 제출 안 해
의사결정 속도 지나치게 늦고 업황 꺾인 후 실무 진행
대외 변수도 악재 연속...시장 가격은 받아들이지 않아
"최고경영진부터 지난 오류 복기하고 대안 미리 세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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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오일뱅크 기업공개(IPO) '삼수' 실패에 책임을 져야할 사람을 한 사람만 꼽으라면 당연히 권오갑 회장이다. 세 번의 상장에 모두 관여한 최고경영자로서 실기(失期)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한 자산운용사 주식운용본부장)
지난 20일, 권오갑 HD현대ㆍ현대오일뱅크 회장이 주요 계열사 사장단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는 정기선 HD현대 사장, 가삼현 한국조선해양 부회장, 강달호 현대오일뱅크 부회장, 손동연 현대제뉴인 부회장 등 주요 경영진이 모두 참석했다.
같은 날 늦은 밤, 현대오일뱅크는 상장 주관사단에 '상장을 철회하겠다'는 내용의 문자를 전송했다. 추가적인 설명은 없었다. 다음날인 21일 아침엔 이를 공식 발표했다. 현대오일뱅크의 세 번째 IPO 도전이 소득없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번 결정으로 현대오일뱅크는 자본시장으로부터 양치기 소년이라는 악명을 얻었다. 증권가도, 기관투자가도, 500여명으로 추정되는 소액주주들도 "더 이상 상장을 추진하겠다는 말을 믿지 않겠다"며 한 목소리로 비난하고 있다. 상장 철회 후 재추진을 하는 기업은 드물지 않지만, 현대오일뱅크는 유독 '간만 보다 여의치 않으면 곧바로 포기'하는 이미지가 강하게 각인됐다.
"SK루브리컨츠도 상장을 세 번 추진했다 결국 철회했는데, 현대오일뱅크만큼 비난받진 않는다. 신고서를 제출하고, 성심성의껏 기업설명회(IR)를 돌고, 수요예측을 통해 시장의 목소리까지 들은 후에 철회했기 때문이다. 현대오일뱅크는 10년간 상장을 추진하며 증권신고서조차 한 번 제출하지 않았다." (증권업계 관계자)
세 번의 상장 철회에선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우선 회사의 의사결정 속도가 지나치게 늦었다. 업황이 고점을 찍은 뒤에야 상장 실무 작업에 착수했고, 그 사이 업황이 꺾였다.
세 번의 현대오일뱅크 상장 예심 청구 시점과 대표적인 동종업계 상장사인 에쓰오일의 주가 추이를 비교해보면 현대오일뱅크의 의사결정 시점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에쓰오일 주가는 국제 유가 및 정제마진과 연동되는 경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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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오일뱅크의 예심 청구 시점은 에쓰오일 주가가 단기 고점을 기록한 직후 조정기에 들어섰을때와 일치한다. 예비심사 준비에도 2~3개월에 소요되는 점을 고려하면, 현대오일뱅크는 정유업체 밸류에이션(가치평가) 수준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상장 실무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이후의 흐름도 동일하다. 정유업은 대표적인 씨클리컬(순환주기) 산업이다. 현대오일뱅크가 심사를 통과할 무렵이면 업황은 이미 꺾인 뒤였다.
이번에도 그랬다. 6월 말 배럴당 30달러를 넘어섰던 싱가포르 복합 정제마진은 현재 10분의 1 토막나 2.8달러선까지 밀렸다. 국제 유가가 최근 하락세를 보인데다, 최대 수요국인 미국의 7월 자동차용 휘발유 수요가 2주 연속 일일 800만배럴대에 머무는 등 고유가로 인한 수요 파괴가 본격화한 덕분이다. 올 상반기 현대오일뱅크 영업이익 추정치는 1조6000억원을 넘어가는데, 하반기는 7000억원으로 전망치가 뚝 떨어진다.
이런 '실기'(失期)에 대해 자본시장에서는 현대오일뱅크의 무거운 의사결정 구조를 첫 배경으로 꼽는다. 지주사인 HD현대를 비롯해 그룹 자금수요 전체적인 관점에서 현대오일뱅크의 상장 시점이 정해지다보니 실무 선에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고 기민하게 움직이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현대오일뱅크는 재무부문장(CFO)이 보통 IPO태스크포스팀장을 겸직하는데, 기껏해야 상무보ㆍ상무급 인사인 재무부문장이 제조ㆍ영업 기능에 치우친 회사에서 큰 목소리를 낼 수가 없는 구조다. 결국 공모 진행 여부는 2012년 현대오일뱅크 대표ㆍ2018년 현대중공업지주 대표이사 현대오일뱅크 사내이사ㆍ2022년 현재 현대오일뱅크 회장인 권오갑 HD현대 대표 선에서 정리됐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런데 권 회장이 자본시장 전문가라고 볼 순 없지 않느냐." (한 증권사 관계자)
물론 현대오일뱅크도 억울한 측면이 있다. 대외 변수가 불리하게 돌아갔다.
2012년엔 유로존 위기가 발목을 잡았다. 동종업체인 에쓰오일 주가가 한 달 사이 30%가량 급락했다. 당시 이란 제재가 본격화하면서, 20% 가량을 이란산 원유로 조달하던 현대오일뱅크도 책임보험(P&I) 발급이 일부 끊기는 등 부침을 겪었다.
2018년엔 회계법인이 발목을 잡았다. 주로 삼일회계법인과 감사를 진행하던 현대오일뱅크는 두 번째 상장 시도를 앞두고 삼정회계법인으로 감사인을 교체했다. 삼정회계법인은 당시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자회사 회계 변경 이슈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며, 합자 자회사인 현대쉘베이스오일을 자회사에서 관계회사로 변경하자고 제안했다.
회계기준 변경으로 현대쉘베이스오일의 이익이 지분만큼으로 줄어들며 현대오일뱅크의 순이익은 오히려 하향 조정됐다. 상장을 앞두고 이슈화를 피하기 위한 나름의 방책이었으나, 결론적으론 긁어부스럼이 됐다. 회계 감리 과정에서 이 사안이 이슈가 되며 예심 통과가 차일피일 밀렸다. 그 사이 또 업황이 꺾였다.
현대오일뱅크는 이듬해 감사인을 다시 삼일회계법인으로 전격 교체했다. 당시 회계기준 변경의 실무를 맡았던 김경일 재정담당 상무도 이후 현 윤중석 재무부문장(상무)으로 바뀌었다.
올해 현대오일뱅크는 상장 심사를 6개월간 받았다. 2020년부터 거래소의 질적 심사기준이 강화된 까닭이다. 거래소가 주주간 계약을 문제시하며 현대오일뱅크를 비롯해 카카오페이 등이 예상보다 오랜 심사를 감수해야 했다. 현대오일뱅크의 경우 2대 주주 아람코와의 물리적 거리 때문에 주주간 계약 조율에 상당한 시간이 들었다는 후문이다.
문제는 이렇게 시장 변화에 대응이 되지 않는 가운데, 시장 가격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상장 준비에 착수한 시점의 추정 기업가치가 '목표'가 됐고, 이후 업황 변화로 인해 이 가격이 시장에서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으면 '제 값을 못 받을 것 같다'며 매물을 거둬들였다.
2012년엔 당초 7조원으로 언급되던 기업가치가 유로존 위기와 이란 봉쇄 이후 4조~5조원 수준으로 줄어들자 주저없이 상장 연기를 택했다. 당시 현대중공업그룹은 현대오일뱅크 상장을 염두에 두고 인수 자금 2조5000억원 중 1조원을 초단기사채인 기업어음(CP)으로, 나머지 1조5000억원은 만기 6개월~1년의 금융기관 브릿지론으로 조달하는 무리수를 뒀다. 이를 상환하기 위해 '목표 공모가'가 강제됐고, 이는 시장 가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계기가 됐다.
2018년에도 마찬가지였다. 10조원까지 언급되던 기업가치가 업황 하락 우려로 6조~7조원 수준이 될 분위기가 되자 미련없이 연기를 택했다. 올해 역시 15조원까지 언급되던 기업가치가 막상 예심 통과 즈음 10조원 이하로 줄어들자 공모를 중단하는 강수를 뒀다. 실무선에서는 10조원 미만 기업가치로도 공모를 진행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최고경영진 급에서 그 가격으로는 안 된다며 제동을 걸었다는 후문이다.
"대표이사로, 사내이사로 두 번이나 상장 철회를 겪었으면 배경을 파악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는 게 상식인데, 권오갑 회장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 같다. '네 번째 상장 철회'라는 국내 자본시장 역사상 초유의 사태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려면, 현대중공업그룹 최고경영진부터 지난 오류를 복기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세우는 고민을 지금이라도 시작해야할 것이다." (한 지배구조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