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예고된 7500달러 보조금 장벽 결국 '현실화'
뒤늦게 불떨어진 韓 여론…"반도체·배터리 이은 수순"
상반기 두각 드러낸 현대차그룹 성적표도 차질 불가피
車산업 맏형·노조 등 사정 감안해도…투자자는 '실기'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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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시행하며 현대자동차그룹이 보조금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번 조치는 미국의 노골적인 자국 산업 보호 조치로 받아들여지는 데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충돌할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이는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 사실상 예정된 악재이기도 하다. 미국 현지 생산·투자를 포함한 청사진을 기다려온 투자자 입장에선 현대차그룹이 실기한 것이란 반응이 나올 수 있다.
현재 우리 정부는 현대차그룹이 미국의 보조금 지원 대상에 제외된 것을 두고 미국 측에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미국의 차별적 조치에 대한 우려를 담은 결의안도 준비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 16일(현지시각) 미 정부가 바이든 대통령이 IRA 법안에 서명한 직후 보조금 지원 대상 전기차 목록을 공개한 데 따른 대응이다.
목록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이 미국에서 판매 중인 전기차 모델 5개를 포함해 현지 판매 전기차종의 70%가 북미 밖에서 만들어진다는 이유로 보조금 지원 대상에 들지 못했다. 목록에 포함된 현지 생산 차량 21개 모델은 대당 최대 7500달러(약 1000만원)의 보조금 수혜를 받을 수 있다. IRA는 ▲원자재와 부품을 미국 또는 미국과 FTA를 맺은 국가에서 조달해 ▲북미에서 만든 전기차에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게 주요 골자다.
바이든 정부는 당선 직후 보조금 형태의 장벽을 세우겠다고 공언해왔다. 지난해 현대차그룹이 미국에 8조원 규모 투자 계획을 내놨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당시 현대차그룹 내부에서도 기존에 밝힌 중장기 투자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밝힐 숫자를 급하게 마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차그룹을 포함해 국내 완성차 산업 내 여러 이해관계자와 정부 부처도 당시부터 곤란한 내색을 비췄었다. 지난해 9월 미국 민주당은 노동조합이 결성된 북미 공장에서 생산한 전기차에 한해 대당 4500달러의 세금을 추가 공제하는 법안을 준비하기도 했다. 당시 호세 무뇨즈 현대차 미국법인 사장은 현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정책 방향을 지켜보며 신중하게 기다려야 한다는 의중을 드러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논란의 여지가 분분함에도 예고했던 보조금 형태의 장벽을 세워버렸다. 이 때문에 시장에선 여론을 포함해 기업과 정치권이 이제 와 들끓는 것을 두고 의아하다는 반응까지 나온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IRA 법안 이전에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에서부터 미국의 노골적인 의도가 현실화하고 있었는데 지금 와서 뒤늦게 여론이 성화를 내고 있다"라며 "전기차의 경우 명백하게 보조금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으니 직관적으로 와닿는 면이 있지만 앞서 반도체나 배터리에서부터 직면하던 불공정이 전기차 순서가 된 것일 뿐"이라 설명했다.
FTA 위반, WTO 제재 가능성 등이 거론되지만 다른 나라 아닌 미국에서 통과시킨 법안을 되돌릴 수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 반응이 더 많다. 지난해 보조금 7500달러란 숫자가 처음 등장했을 당시에도 비슷한 논의가 있었지만 전임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중 갈등이 격화하면서 자유무역 중심의 국제 기조 자체가 유명무실화했다는 분석이다. 지금 제소해서 결론이 날 때쯤이면 이미 대부분 완성차 기업이 미국 공장을 가동하고 있을 시점이라 실질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때가 이미 지났다는 지적도 나온다.
증권사 자동차 담당 한 연구원은 "노조나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자국 기업만 감당할 수 있는 형태로 보조금 지급 기준을 마련하면 사실상 외국 기업을 차별하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다"라며 "한 발짝 더 들어가면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로 인한 시장의 비정상화를 주도적으로 바로잡는다는 명분 하에 이 같은 일을 벌이고 있어 따라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IRA 법안으로 글로벌 공급망 차질 속에서 두각을 드러낸 현대차그룹의 전동화 전략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상반기 현대차그룹은 생산 역량에서 경쟁사를 압도하며 좋은 성과를 거뒀다. 아직은 수출 중심으로 대응하더라도 가격경쟁력이 뒷받침하는 데다, 신차에 대한 호평도 이어졌기 때문이다. 전기차 시장조사기관 EV볼륨즈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은 상반기 중국 BYD와 함께 유일하게 전기차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린 기업으로 꼽힌다.
IRA는 이 같은 성과의 한 축인 가격 경쟁력에서 악재로 풀이된다. 전기차 업체 대부분이 이미 원자재 가격 인상으로 인한 배터리 판가 압력으로 신음하던 차에 현대차그룹이 혹을 달게 된 셈이다. 시장에선 상반기 전기차 시장의 전체 성적표가 IRA 법안의 빠른 발효를 앞당겼다는 시각도 상당하다. 미국 완성차 업체가 해외 기업에 추월당하는 걸 바라볼 리 만무하단 얘기다.
배터리 업계 한 관계자는 "5월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바이든 대통령이 방한하고 현대차그룹이 현지 투자 계획을 발표할 때부터 이렇게 가는 게 맞느냐 하는 얘기가 돌았다"라며 "당시 미국과 유럽 전기차 메이커가 생산과 판매에서 고전하고 있으니 IRA 통과에 힘이 실리던 상황이어서 국내 배터리 업체까지도 중장기 전략 재검토에 들어간 상황이었다"라고 전했다.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정치적 변수가 산적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현대차그룹이 실기했다는 평가를 면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부터 현대차그룹의 투자자 설명회(IR)에서 미국 현지 전기차 전용 공장 등을 포함한 투자 청사진에 대한 질문이 단골 소재였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은 내년부터 일부 전략 전기차종의 미국 현지 생산을 계획하고 있지만 미국 투자 결정 자체는 경쟁사에 비해 늦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직까지 전기차 전용 공장은 없고 내연기관과 혼류 생산을 택하고 있기도 하다. 미국 현지 배터리 합작법인(JV) 파트너십과 전용 공장 등 방향성이 갖춰졌음에도 고민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지난 3월 현대차의 'CEO 인베스터 데이'에서도 미국 현지 전기차 생산 계획에 대한 투자자 질문에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지 못했었다.
현대차그룹이 ▲국내 내연기관 생태계의 실질적인 책임자라는 점과 ▲고질적인 노사 관계 등 결정이 늦어질 수밖에 없는 사정도 거론된다. 지난해 현대차그룹이 서둘러 8조원 규모 미국 투자 계획을 내놨을 때 현대차 노동조합은 "4차 사업혁명을 앞세운 사측의 도발에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라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당시 새로 위원장에 당선된 후보는 선거운동에서 "악으로 깡으로 안 되면 될 때까지"라는 구호를 내걸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자자 입장에선 좀 더 빨리 대응하지 못한 현대차그룹에 투자할 유인이 줄어드는 셈이다. 시대착오적인 노조와 노사 관계 역시 기업이 풀어야 하는 여러 변수의 하나에 불과하단 얘기다.
증권사 한 관계자는 "미국의 무리한 요구로 피해를 보는 것이 전기차 산업만의 일이 아니고 기업의 사정을 봐줘가면서 투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며 "내연기관 출구전략이나 미국 현지 생산 문제 대응 등에서 현대차그룹이 안일하게 대처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