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줄 말라가는 자본시장
미래 보단 현재…현금흐름에 주목
성장 멈추고, 몸 값 떨어지기 시작한 韓유니콘
"그나마 지금이 낫다" 서둘러 상장 나선 기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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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이제 캐시우드(Catherine D. Wood)를 거론하는 투자자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로봇공학과 핀테크 항공·우주와 같은 초기 단계 혁신 기업에 투자를 집중했던 그는 월가를 대표하는 실패 사례가 됐다.
쿠팡과 야놀자, 한국 유니콘 기업과 투자자들에게 단비와 같은 존재였던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최근 반성문을 냈다. "큰 이익을 냈을 때 스스로 제일 잘난줄 알았던 게 지금 와서는 굉장히 부끄럽다"란 짧은 문장으로 대표하는 반성의 메시지는 불과 2~3년, 짧게는 1~2년 전과 확 바뀌어버린 자본시장의 모습을 대변한다.
적어도 지난 수 년 간은 투자자들의 관심을 받은 스타트업이 유니콘을 넘어 데카콘에 등극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기업가치가 수 천억원씩 뛰었다는 말이 공언(空言)이 아닐 정도로 비상장 기업에 대한 투자는 열풍을 넘어 광풍과도 같았다.
자본시장에 풀렸던 자금은 이제 막 회수 단계에 접어들었다. 각국 정부의 유동성 흡수 기조가 언제 멈출지 현재로선 가늠할 수 없다. 미국은 물론 국내 증시도 가파른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대체투자 시장에 낀 버블은 걷혔다. 끊임 없는 투자 유치, 또는 기업공개를 통해 수 조원에 달하는 몸 값을 증명해야하는 유니콘을 넘어선 기업들의 고민은 깊다. 날개를 단 유니콘에 올라탔던 투자자들의 투자금 회수를 위한 전략적 판단이 여느때보다 중요해졌다.
‘모빌리티 유니콘 최초 상장’이란 타이틀을 내건 쏘카는 22일 코스피에 상장했다. 당초 목표했던 공모가(최대 4만5000원) 대비 절반가량 몸 값을 대폭 낮췄다. 자존심을 꺾으면서까지 상장을 감행했지만 상장 첫 날 받아든 성적표는 초라했다. 첫 날 종가 기준 시가총액은 8800억원 수준,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이란 명함을 무색케 했다. 회사와 투자자들이 이 같은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PO를 강행한 것은 향후 운영 자금을 위한 실탄 확보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사실 기술주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이 시들한 상황에서 향후 더 높은 몸 값을 받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시일이 소요될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1분기 매출 1005억원, 영업이익 약 30억원을 기록한 야놀자는 올해 나스닥 상장을 예정대로 추진할 계획이다. 유사기업(피어그룹)으로 꼽을 수 있는 기업들과 격차가 상당하다. 물론 기술주·성장주의 가치를 실적으로만 따질 순 없지만 유사기업들의 주가매출비율(PSR)과 비교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의 장외가를 형성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을 반영해 현재 시점에서 나스닥 상장을 강행한다면 큰 폭의 몸 값 하락을 감수해야하는 상황에 처할 가능성도 있다. 이는 최근 최악의 실적을 기록한 대주주 소프트뱅크의 의지와 그나마 지금이 가장 높은 몸 값을 받을 수 있는 적기란 판단이 깔려있단 평가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컬리도 증시입성을 추진한다. 22일 코스피 상장예비심사를 통과한 컬리는 향후 6개월 내 상장을 완료한다. 컬리가 지난해 말 앵커에쿼티파트너스로부터 2500억원 규모의 상장전투자유치(Pre-IPO)에 성공했을 당시 인정받은 기업가치는 약 4조원이었다. 한 때 기업가치가 최대 8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일부 투자자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현재 상황에서 기존 몸 값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물음표가 붙는다.
모바일뱅킹의 선두주자격인 토스(비바리퍼블리카)의 성장 곡선은 둔화했다. 최근 국내 기관투자가들로부터 자금을 유치하며 인정받은 기업가치는 약 8조5000억원, 지난해 국내외 기관투자가들로부터 투자유치를 받을 당시와 거의 유사하다. 당초 9조~9조5000억원을 밸류를 희망했던 것과 비교하면 눈높이를 상당히 낮췄다.
비상장 기업들의 몸 값이 떨어지는 상황은 상황은 비단 공모시장의 침체, 그리고 주식시장의 불확실성이 지속할 것이란 전망 때문만은 아니다. 글로벌 자본시장의 불확실성이 확대하면서 장래의 사업확장보다 현재의 매출과 영업이익, 자산이 탄탄한 기업에 대한 주목도가 오히려 높아진 원인도 있다.
컬리의 지난 3년의 누적 영업손실만 약 4200억원이다. 토스 또한 적자 규모가 확대했다. 적자의 늪에서 언제 빠져나올지 모르고, 자본은 꾸준히 투입돼야하는 그리고 더 이상 신선하지 않은 사업에 PDR(Price to Dream Ratio)의 기준을 고집하긴 더 이상 어려워졌다. 미국 시장에서 테크기업에 대한 열풍이 빠르게 식은 것과 손정의 회장이 스타트업의 투자를 전년 대비 최대 절반까지 줄이겠다고 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기관투자가들 또한 향후 수 년을 내다보고 투자하기보단 당장의 현금흐름이 더 중요해졌다. 올해 부턴 최고의 수익률을 내기보단 수익률을 방어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이다.
상장을 통한 투자금회수(엑시트)의 방안은 더 이상 제 1의 선택지가 아니다. 성장기업에 대한 관심이 시들한 상황이 지속하면 IPO는 물론 중간 단계의 투자금 회수도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유동성이 넘치던 시기엔 시리즈A부터 Pre-IPO 단계까지 순차적으로 자금이 유입됐고, IPO를 통해 성공적으로 투자금을 회수하는 사례도 찾아볼 수 있었다. 크래프톤, 하이브와 같은 VC와 PEF 등 일부 투자자들의 소위 대박(?) 사례에서 기관투자가들과 일반 투자자들이 느끼는 피로감도 상당히 컸다. 향후 수년 간 이 같은 사례가 또 등장할 것으로 내다보는 투자자들은 많지 않다.
한 바탕 잔치를 끝낸 비상장회사에 대한 투자에 대해선 재평가가 시작됐다. 기관투자가들은 수년 뒤에 가능할지 장담할 수 없는 대박 투자를 차치하고 기존의 포트폴리오를 다시 점검해봐야 하는 상황에 몰려있다. 이미 유니콘, 데카콘으로 평가받는 토스·컬리·두나무·케이뱅크·오아시스마켓 등의 장외시가총액은 큰폭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투자은행(IB) 업계 한 관계자는 "기관투자가들이 투자한 상장기업은 물론 비상장기업들의 가치가 지난해에 비해 큰 폭으로 떨어지면서 평가손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투자여력이 상당히 제한적이다"며 "특히 밸류에이션에 대한 이견이 큰 테크기업의 경우 굉장히 선별적이고 보수적으로 투자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국내외를 막론한 기관투자가들의 이 같은 기조는 자본시장내 현금흐름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비상장회사에 대한 투자 니즈가 줄어들면 해당 기업들 가치의 연쇄적인 하락이 발생하고, 가뜩이나 돈 줄이 마르는 자본시장에서 테크·성장주 기업들에 흘러갈 자금은 더욱 줄어들게 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 한 대형출자기관 CIO는 "대체투자자산에 대한 버블은 아직 꺼진 것도 아니다”며 “그동안 기술주에 대한 과도한 투자시장의 관심이 향후 수년에 걸쳐 잦아들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상당히 조심스런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