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 업계에 닥친 혹한기, 리스크 분담 움직임
주주명부 늘고 주주 관리 더 어려워진 스타트업들
-
- 이미지 크게보기
- (그래픽=윤수민 기자)
국내 벤처캐피탈(VC)업계에 '리드투자자'(투자비중 30% 이상의 최우선 투자자)가 사라지면서 다수의 투자자들이 소액씩 모아 투자하는 '십시일반(十匙一飯) 투자' 사례가 늘고있다.
미국 실리콘밸리 VC 운용사들 사이에선 이미 익숙한 '리드 투자자'라는 개념은 국내 VC 시장에서도 통용할 정도로 익숙해졌다. 막대한 유동성에 힘입어 VC업계에 과감한 투자가 이어졌던 지난해와는 달리 최근엔 기관투자가와 금융기관 등은 모두 돈 줄을 죄고 있다.
상장사의 기업가치는 물론, 비상장회사들의 밸류에이션(기업가치평가) 또한 예년에 못미치는 상황에서 투자자들 또한 앞장서 투자하길 꺼리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주요 지분을 보유하며 트로피를 거머쥐는 투자 대신 다수의 투자자들이 비교적 소액의 투자금을 모아 리스크를 분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는 평가다. 투자를 받는 기업들 입장에선 까다로운 투자자들이 늘어나는 부담을 안게 됐다는 지적이다.
최근 벤처투자(VC) 업계에선 다수의 기관들이 공동구매(클럽딜) 형식으로 소액을 투자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지난 5일 현대차그룹이 전략적 투자자(SI)로 참여한 라이다 센서 전문 스타트업 오토엘은 110억원 규모의 시리즈A 투자 유치에 성공했는데 4곳의 전략적투자자(SI)와 5곳의 재무적투자자(FI)가 참여했다. 무설탕·저당 식품 제조 기업인 '마이노멀컴퍼니'도 17억원 규모의 프리시리즈A(Pre-A) 단계의 투자를 유치했는데 해당 라운드에만 롯데벤처스, 마그나인베스트먼트, 옐로우독, 리벤처스 등 6개 기관투자가들이 참여했다. 최근 한 의료기기 관련 기업은 5개 기관투자자들로부터 50억원가량의 투자유치를 추진 중이다.
비교적 작은 규모의 투자에도 다수의 기관들이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사실상 '리드 투자자'가 실종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리드투자자는 해당 라운드 투자 총 투자 금액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고 투자 조건을 조율하는 역할을 하는 투자자를 의미한다. VC업계의 생태계가 오래전부터 자리잡은 실리콘밸리에선 리드투자자로서의 평판이 오랜 기간 지속되는 편이다. 리드투자자서로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거두면 다른 운용사들과 쌓아온 신뢰를 바탕으로 추후에 클럽딜을 추진하기에 용이하다는 전략적 판단도 깔려있다.
풍부한 유동성에 힘입어 국내 VC업계의 성장세가 이어지며 국내에서도 '리드투자자'를 자처하는 기관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다. 올해 3월 인테리어 플랫폼 오늘의집이 2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할 당시 산업은행이 1000억원을 출자하며 리드투자자로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하락장이 이어지고 비상장 기업들의 몸 값도 쪼그라들기 시작하면서 이같은 리드투자자들의 존재감이 상당히 옅어졌다는 지적이다.
새로운 투자자가 리딩투자자 역할을 맡는 대신 직전 단계에 투자사 중 한 곳이 리딩을 맡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7월에 있던 토스 운영사 '비바리퍼블리카'의 2958억원 투자유치에 기존 투자자였던 알토스벤처스가 리드투자자로 참여해 1000억원가량을 투자한 것도 유사한 사례다.
VC 업계 한 관계자는 "최근엔 리드 투자자로 나서는 곳이 거의 없다보니 다수의 운용사들이 소액으로 분산 투자하는 형태가 늘었다"며 "모든 투자자들이 균등한 금액을 투자하진 않더라도 대부분 비슷한 규모의 투자를 통해 리스크를 분산하는 효과를 노린다”고 말했다.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후속 투자유치를 계획 중인 기업들은 이같은 상황에 부담이 가중되는 모양새다. 다수의 투자자들이 같은 투자 유치 과정에 참여하면 기업입장에선 관리해야 할 주주가 상당히 늘어나게 된다. 생존을 위해서 끊임 없이 투자유치에 성공해야하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스타트업의 경우 현재와 같은 하락장에선 우려가 더 큰 편이다. 유동성 장세에서 지난 수 년간 키워온 기업 가치를 다시금 인정받을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자칫 현금흐름이 악화하거나 다음 투자유치 단계에서 기업가치가 쪼그라들면 기존 주주들의 불만이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투자금융업계 한 관계자는 "최근 벤처투자업계에선 리스크를 지지 않고 초기 기업에 투자를 함으로써 수익을 도모하려는 양상이 짙은데 자금을 끊임없이 조달해야하는 스타트업들은 상대해야할 주주가 많아 부담이 커지는 상황"이라며 "상장 준비 초기부터 긴 주주명부가 우려사항으로 지적된 컬리와 같이 주주가 너무 많아지면 추후 엑시트(투자금회수)에도 제동이 걸릴 수도 있다는 부담도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