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성은 인정, "시장 안정화 수준에 그칠 것"
만기 앞둔 ABCP만 13兆…"1.6兆 채안펀드 실효성 의문"
이에 정부 '50兆+α' 지원책 공개…늑장대응 논란
기업 실적발표 시즌, 증안펀드 효과 상쇄 가능성
-
- 이미지 크게보기
- (그래픽=윤수민 기자)
"필요성은 있죠. 그러나 그것만으론 시장안정화 효과가 미미할 겁니다" (국내 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
유례없는 글로벌 긴축 상황에 요동치는 자본시장을 안정화시키고자 금융당국이 채권시장안정펀드(이하 채안펀드)와 증권시장안정펀드(이하 증안펀드) 재가동이라는 카드를 내밀었다. 이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채권, 주식 펀드매니저들은 시장 안정화 차원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기대감은 그리 크지 않은 모습을 나타냈다.
잇단 기준금리 인상으로 채권 발행금리가 오르는 등 조달비용이 커진 기업들이 최근 상당히 위축돼 있다는 점과 만기 도래를 앞둔 단기채권 규모에 비해 규모가 작다는 점이 채안펀드 가동 효과 회의론의 근거들이다. 이에 최근 정부가 내놓은 '50조원+알파(α) 규모 유동성 대책'에 이목이 집중되지만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의 충돌로 인한 여파도 살펴야 한다는 지적도 조심스레 제기된다.
증안펀드는 일시적인 코스피지수 상승을 이끄는 효과를 기대할 순 있지만 글로벌 경기 침체를 맞닥뜨린 기업들의 3분기 실적 발표를 앞두고 있어 펀드 가동 효과를 장기적으로 이어갈 순 없을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시장 살리기엔 채안펀드론 역부족"…뒤늦게 나온 50兆+α 지원책
24일부터 가동되기 시작한 채안펀드는, 금융위원회(이하 금융위)의 채권시장 안정화를 위한 고강도 지원책을 통해 20일 재가동 여부가 알려진 바 있다. 해당 대책에 따르면, 채안펀드의 여유재원 1조6000억원으로 기업어음(CP) 등 단기채권을 매입하고, 추가 캐피탈콜(필요시 자금지원) 실시도 즉각 준비한다. 또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관련 금융 지원 프로그램도 마련할 예정이다.
채안펀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회사채 시장의 유동성 경색을 해소하기 위해 처음 시행됐다. 당시 펀드는 10조원 규모로 조성, 신용등급이 BBB+ 이상인 은행채, 여전채, 회사채 등에 투자했다. 이후 코로나19 사태로 재발한 유동성 위기에 또다시 가동된 해당 펀드는 3조원 규모로 조성, 1조4000억원이 투입돼 1조6000억원가량이 남아있는 상태다. 해당 자금을 금번 유동성 위기 대응에 활용하겠다는 복안이다.
펀드매니저들은 채안펀드 가동 필요성에 대해선 공감하지만 효과가 미미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물론 채안펀드 가동 이후 회사채 AA- 신용 스프레드가 6개월 만에 300bp(1bp=0.01%포인트) 하락하는 등 채권 시장이 안정화되는 효과가 나타난 전례가 있다. 그러나 이번 유동성 위기는 '수년간 이어진 부동산 활황에 따른 PF 대출 증가'와 '글로벌 긴축정책으로 인한 기준금리의 급격한 상승' 등으로 촉발한 만큼 매입해야할 채권 규모와 그 효과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평가다.
먼저 기업들이 조달금리 부담으로 인해 회사채 발행을 망설이는 점이 한계로 거론된다. 최근 한국은행이 두 번 연속 빅스텝(한번에 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에 나서며 회사채 발행에 필요한 가산금리가 대폭 상승, 3년 만기 AA- 무보증 회사채 금리는 5% 중반까지, BBB- 등급은 11%대까지 치솟았다.
투자금융업계 한 관계자는 "채안펀드 자금 외 추가로 유동성을 풀지 않는 이상 채권시장 활성화를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라며 "특히 레고랜드 사태로 국가신용등급에 준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신용이 깨지면서 해외 신용평가사들은 해당 사태 이후 추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향후 해외기관의 크레딧 투심을 저하시킬 가능성이 있는 셈인데 구조적으로 채권 시장이 망가지는 모습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만기가 도래하는 자산담보부기업어음(ABCP)을 모두 소화하기엔 펀드의 규모가 시장의 기대보다 작은 편이라는 평가다.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11월 만기가 도래하는 단기 PF 유동화증권 발행 잔액은 2조8000억원(건설사 신용보강), 10조7000억원(증권사 신용보강)으로 총 13조원대에 이른다.
이에 23일 정부가 내놓은 '50조원+알파(α) 규모 유동성 대책'에 업계 이목이 쏠리고 있다. 채안펀드(20조원)를 포함해 산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 16조원, HUG(주택도시보증공사)·주택금융공사 10조원, 한국증권금융 3조원을 더해 총 50조원을 시장에 공급해 안정화를 꾀하는 것이 골자다.
해당 대책안이 절대 규모 측면에서 시장 기능 회복에 기여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기대감은 있다. 다만 정부의 늑장대응에 대한 논란과 더불어, 정부 차원 지원책을 두고 줄곧 제기되던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충돌'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는 우려가 다시금 제기되기 시작한 건 외면하기 어렵다. 일각에선 한국은행이 시장 안정화 대응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관련, "그간 한은은 뚜렷한 통화 정책 없이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평이 나왔다.
3분기 실적발표 앞두고 가동되는 증안펀드…"일부 기관에겐 매도 기회"
내달 가동이 예정된 증안펀드도 채안펀드와 비슷한 평가를 받는다. 필요성은 있지만 극적인 증시 반등 효과까지 기대해선 안 된다는 경계의 목소리가 나온다.
증안펀드가 가동되는 시점을 정치권에서 '증시 바닥'을 인식하는 선이라고 판단한 일부 투자자들이 주식 매수에 나설 가능성은 존재한다. 다만 고려해야 할 변수가 상당히 많다.
국내 기업들의 3분기 실적이 곧 발표를 시작한다. 코스피 내 시가총액(이하 시총) 기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삼성전자도 최근 3분기 영업이익이 증권가 전망치(약 11조9000억원)을 밑돌았고, 주가 하향 추세의 끝을 예단하기 어려운 시점에서 다른 대기업들에 대한 위기감도 확산하고 있다. 기업들의 실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긍정적인 외부 요인들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증안펀드 가동 이후 코스피 반등을 이어나갈 요인이 딱히 없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오히려 증안펀드를 통해 일시적으로 공급될 유동성을 기회로 삼아 일부 기관투자가들이 보유한 주식을 시장에 쏟아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기업의 자사주 매입 등과 같은 매수세가 예상될 때 이를 틈타 주식 보유 비중을 줄이는 투자자들도 있었다. 지난 2005년 삼성전자가 자사주 매입에 나설 당시 도이치증권, 골드만삭스 등 외국계 증권사들은 각각 5만주, 2만주에 달하는 주식을 대거 매도한 바 있다.
국내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증안펀드 가동에 맞춰 투자자들이 주가 반등을 기대하고 주식을 매수할 경우 손실을 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며 "증안펀드가 주식 시장의 일부 안정화에는 기여할 수 있지만 이번 증시 하락은 국내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영향이 크기 때문에 지속적인 상향 곡선이 나타나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