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S&P지수 '전망치', 20년만에 하락 전망 등장해
美 고용 제외 각종 지표는 이미 경기 경착륙 예고 중
"기업 성장세 무너지면 지표 인식 정상화...고통 있을 것"
-
"올해까지는 '내리면 사라'(Buy the dip)가 먹히는 시장이었습니다. 내년엔 경기 침체 징조가 명확해지는 상황에서 '오르면 팔아라'(Sell the rip)가 해답이 될 겁니다. '나쁜 게 좋다'(bad is good)의 이상한 시대는 가고, '나쁜 건 나쁜 것'(bad is bad)으로 정상화되는 과정에서 고통이 있을 겁니다." (한 중견 자산운용사 주식운용본부장)
2023년 미국 대표지수인 S&P500지수는 역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주요 리서치센터의 전략가들이 내놓은 '전망치'가 하락으로 점쳐진 것은 2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국내 코스피 상장 기업의 2023년 순이익 전망치도 올 하반기에만 10% 이상 하향 조정됐고, 전망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10%에서 많게는 20% 이상 추가 하락이 예상되고 있다.
주가와 주가지수는 기업의 순이익과 밸류에이션(배수)의 함수로 결정된다. 밸류에이션은 시중에 돈이 넘칠 때나, 향후 경기 전망이 밝을 때 높아진다. 주요국 기준금리가 연초 대비 크게 오른데다 미국의 양적긴축(QE)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내년 증시의 밸류에이션이 높아지길 기대하는 건 쉽지 않다는 게 현재 증권가의 주류 의견이다. 여기에 기업의 실적도 이전 대비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는 지적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회자되고 있는 말이 '오르면 팔아라'다. 내년 대세 하락장은 피하기 어려우니, 단기 호재로 주가가 오르면 매도 후 현금 보유 혹은 저위험 자산으로 갈아타라는 조언이다.
내년 미국ㆍ한국 증시 모두 '상저하고' 전망이 대세지만, 이는 미국의 긴축 정책 종료와 기업의 실적 개선을 전제로 한다. 우려대로 경기 경착륙(하드 리세션)이 찾아와 기업 실적이 무너지면, 하반기 회복을 기대하며 '매수 후 보유'하는 전략은 의미가 없어진다는 지적이다.
-
경기 침체의 전조는 이미 여러 곳에서 눈에 띄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국제 유가다. 물가상승(인플레이션) 우려가 극도로 커졌던 올 상반기 배럴당 120달러선까지 폭등했던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I) 가격은 현재 70달러대 초반까지 밀린 상황이다.
원유 가격만이 문제가 아니다. 산업 경기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경유 수요가 크게 줄어들고 있다. 미국 경유 소매가격은 최근 6주 연속 하락했으며, 특히 최근 4주 동안은 코로나 유행 이전인 2015~2019년 평균선조차 밑돌고 있다.
미국 제조업 경기도 30개월만에 위축세로 돌아섰다. 지난 1일 발표된 11월 미국 공급관리자협회(ISM) 제조업 구매관리자 지수(PMI)는 49.0으로 확장ㆍ위축의 경계선인 50을 밑돌았다. 시장 예상치(49.7)도 하회했다.
제조업 신규수주는 49.2에서 47.2로 3개월 연속 급락했다. 제조업 신규수주 지수의 하락세는 기업의 고객 주문 둔화를 예상하거나 이미 겪고 있다는 뜻으로, 향후 기업 실적이 좋지 않을 수 있다는 전조로 꼽힌다. 소규모 개방경제 국가인 한국의 기업실적은 일반적으로 미국 ISM 제조업 PMI와 비슷한 추세를 보인다는 점에서, 국내 기업 실적에도 좋지 않은 신호로 해석된다.
미국 소비심리지수, 주택가격지수, 국내 소매판매액 증감률 등 주요 경기 지표들도 모두 하반기 들어 크게 꺾이며 코로나 대유행 이전 수준까지 떨어졌다. 미국 소매판매지수 등 일부 지표는 금융위기 수준까지 밀린 상황이다. 주택가격의 급락으로 인한 연쇄 충격도 우려된다. KB증권은 지난달 "빠른 긴축과 이미 시작된 주택가격 하락세는 경기 연착륙 가능성을 없앴다"로 예상했던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긴축 정책 전환(피벗;pivot) 기대감으로 '나쁜 지표가 나올 때마다 주가가 급등하는 현상'은 지속되고 있다. 이른바 '나쁜 게 좋은 것' 심리다. 이는 '내리면 사라'는 양적완화 시절의 투자 공식이 아직도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현재 미국 증시는 내년에 경기침체가 찾아오고, 이 때문에 내년 하반기 이후 1년간 미국 기준금리가 100bp(1%포인트) 이상 낮아질 거란 기대감까지 반영된 수치"라며 "일부 연준 인사들이 '기준금리를 빨리, 쉽게 낮출 거라 기대하지 말라'는 경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건 이런 까닭"이라고 말했다.
내년 연준이 여러 방식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내년 미국의 기준금리 추이는 '보다 높게, 길게'(higher, longer)이다. 산업 지표는 줄줄히 추락 중이지만, 고용 지표는 견조하고 임금 상승에 따른 추가적인 인플레이션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 평가다. 금리의 최고점을 현 수준에서 유지하며, 대신 이를 오래 끌고 감으로서 시장에 존재하는 초과 수요를 누그러뜨려 물가를 잡겠다는 전략이다.
문제는 미국의 경기, 나아가서는 세계 경기가 이를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지다. 현재 연준이 기준금리 결정에 핵심 준거로 삼고 있는 지표는 고용인데, 미국 고용은 견조한 상태다. 경기가 와르르 무너지고, 이로 인해 실업률이 치솟으면 그제서야 '피벗'이 이뤄질 수 있다는 전망이 일단은 우세하다.
중독에 가까웠던 유동성과 레버리지(신용확대), 버블(거품)이 혼재돼있는 현 상황에서 '높게, 길게'는 이뤄질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온다. 지난달 말 이은택 KB증권 연구원은 "명목지표만 보면 '높게, 길게'를 해도 되지만, 연준은 '금융시장 안정'을 우려하기 시작했다"며 "영국 국채시장과 일본 엔화에서 보듯 지금의 금융시장은 이를 견뎌낼 만한 위치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성장 둔화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 '나쁜 건 나쁜 것'(bad is bad)로 시장이 '정상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다. 한 증권사 트레이더는 "내년 1분기 실적 시즌을 시작으로 성장에 충격이 올지 유심히 지켜봐야 한다"며 "기업의 성장세가 무너지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 경기 침체 우려와 함께 나쁜 지표가 주가에 하락 압력으로 작용하는 시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