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초가 공정가치, 지금은 일시적 폭락'
기업가치에 대한 눈높이 아직 지난해 머물러
시장과의 간극 커 내년 공모 발행사 적을수도
"IPO도 순환시장, 공모투자자 수익률 나을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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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상장 주관을 맡고 있는 한 기업의 최대주주와 면담을 했다. 새해 상장 전략을 짜보려고 한 것인데, 기업가치에 대한 눈높이가 과거에 머물러있었다. 당시의 가치가 '공정가치'이며, 지금의 폭락한 가치는 공포로 인한 '일시적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 시각차가 좁혀지지 않으면 새해에도 공모주 시장은 회복이 어렵다. 직전엔 투자자가 없었다면, 이제는 발행사가 없을 것이다." (한 증권사 상장 담당 임원)
2022년 국내 기업공개(IPO) 시장은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 상반기 LG에너지솔루션으로 인한 착시를 제외하면, 상장 기업 수나 공모 규모 면에서 최근 5년내 바닥에 가까웠다. 작년 국내 IPO 시장 규모는(기업인수목적회사 제외) 15조6200억여원으로 2021년 19조원에 비해 20%가량 축소됐다.
여기서 사상 최대 규모 공모였던 LG에너지솔루션을 제외하면 공모 규모는 2조8000억여원으로 크게 줄어든다. LG에너지솔루션 IPO가 극히 예외적인 거래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IPO 시장 규모는 전년대비 80% 이상 줄어든 셈이다. 상장 극성수기인 12월에 청약을 진행한 발행사가 바이오노트 단 한 곳(스팩 제외)뿐이고, 13곳의 기업이 공모를 철회하며 역대 최다 철회 기록을 다시 썼다.
새해엔 IPO 시장이 회복될 수 있을까. 직전 IPO 시장의 저조한 성과는 '투자심리 실종'이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상당수 유동성이 1월 LG에너지솔루션에 빨려들어가기도 한 데다, 급격한 긴축 진행으로 증시가 폭락에 가까운 조정을 거치며 가격 검증이 되지 않은 신규 상장주를 아예 회피하는 심리가 퍼진 것이다. 여기에 부동산 시장 부실 우려로 시작된 유동성 위기가 4분기 자본시장을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가기도 했다.
새해엔 작년 수준으로 투자심리가 얼어붙어있진 않을 거란 전망이 많다. 유동성 위기는 어느 정도 해소됐고, 긴축 공포 역시 피크아웃(고점 후 하락) 국면에 접어들었다. 경기 침체에 따른 기업 이익 하락 우려가 남아있긴 하지만, 일단 새해 증시는 올해보단 나은 상황을 보일 거란 이야기도 적지 않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공정가치에 할인율이 적용되는 공모주가 차선의 투자처가 되기도 한다.
문제는 발행사다. 투자자들이 투자할 준비가 된다한들, 발행사가 현재 시장에서 평가하는 기업가치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공모를 진행할 수 없다. 10년 전 금융감독원이 증권신고서 심사 절차를 개편한 이후, 신규 상장 기업은 이전보다 더욱 엄격하게 '증시 내 유사 기업ㆍ업종'과의 비교가치로 공모가를 산정해야 한다. 주가 하락으로 인해 주가수익비율(PER) 등 전체적인 밸류에이션(가치판단) 잣대가 하락한 상태에선 공모가를 높게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
2020~2021년 사이 유동성이 폭증하던 시기 기업가치를 높게 인정받았던 기업의 경우 현실적으로 눈높이를 낮추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컬리ㆍ케이뱅크ㆍ현대엔지니어링 등 주요 상장 예정 기업의 비상장 가치는 적게는 30%에서 많게는 70% 이상 하락한 상태다. 일례로 컬리의 경우 올해 4월만 해도 장외에서 주당 10만5000원에 주식이 거래됐지만, 최근 장외 거래가는 3만원대 초반에 그친다. 같은 기간 케이뱅크의 장외 시가총액도 8조4000억원에서 4조4000억원으로 반 토막 났다.
기업의 최대주주 및 재무적 투자자(FI)들이 바뀐 기업가치와 시장상황을 받아들이는 데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전망이다. 상당수 기업이 기업가치와 관련해선 지금 현재를 '비정상적'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대형증권사 IPO 담당 실무자는 "요즘도 전년대비 경영지표와 실적, 점유율 등이 더 나아졌는데 왜 기업가치는 떨어져야 하느냐'고 질문을 받는 경우가 많다"며 "운영자금이 급하지 않거나, FI와 특정연도까지 상장을 약속하지 않은 기업이라면 굳이 어려운 시기에 몸값을 낮춰 상장하려는 기업을 많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시장의 분위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대어급' 빅딜(big deal)의 경우 가격 문제에 좀 더 민감하다. 자존심과 직결되는 이슈인 까닭이다. 시장 침체기 중소ㆍ벤처기업은 수요예측 과정에서 기관 수요가 다 차지 않아 상장 철회하는 경우가 많지만, 대기업은 충분한 기관 수요를 끌어들이고도 제시받은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철회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현대오일뱅크나 SK루브리컨츠 등이다.
오너일가 등 최대주주, 그리고 상장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FI들의 '눈높이'가 어디까지 낮아질지가 내년 IPO 시장 업황의 핵심 변수가 된 셈이다.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IPO 역시 순환하는 시장으로, 투자 수요가 줄어 공모가가 시장에서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수준까지 낮아지면 다시 자금이 몰리며 수익성이 좋아질 것"이라며 "개인적으로 내년엔 2020~2021년 사이 상장 전 투자(Pre-IPO) 단계에서 유입된 사모투자자들보다, 공모가로 투자한 공모투자자들의 수익률이 더 좋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