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피해진 사후관리…무리한 요구·소통 단절에 "난감"
"2023년, 사후관리 뿐만 아니라 펀드레이징도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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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벤처캐피탈(VC) 심사역들이 투자한 회사(포트폴리오)에 대한 '사후관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밸류에이션에 대한 눈높이를 안낮춰 파산에 직면하는가 하면, 회사 살림을 도맡은 최고재무책임자(CFO)가 도망치듯 퇴사하는 일 등이 벌어지기 시작해서다.
유동성 경색으로 기업들의 운영자금이 말라붙는 반면, 새로운 자금유치는 더욱 어려워진 때문인데 올해 상황은 더욱 안좋아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과거 벤처캐피탈로부터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 기업들은 VC 심사역들에게 '사후관리'를 해달라고 주문하는 일이 많았다. 이때 사후관리는 일종의 '서비스'(?) 개념으로, "이왕 투자를 했으니 사업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파트너사를 소개시켜주거나 시리즈별로 후속 투자유치를 지원해 달라"는 요구들이었다.
VC 심사역들 상당수는 이런 사후관리 요청에는 상당한 부담을 느끼기도 했다. VC 심사역 1인당 관리하는 투자기업이 많은 편인데, 특정기업에 세세하게 서비스를 제공하기 어려워서다.
최근 상황이 정반대가 됐다. 호황기가 지나고 투자한 스타트업들의 줄도산 우려마저 고개를 들고 있다. 이에 VC심사역들은 '사후관리'의 본래적인 의미, '재무상황'에 초점을 두고 투자기업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자금이 부족하지 않느냐", "혹시 망하지 않을 상황이냐"를 일일이 체크하러 다녀야 할 상황이라는 것.
이 과정에서 어려움을 호소하는 VC 심사역들도 적지 않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문제점은 "아직도 스타트업 기업들이 눈높이를 낮추지 않고 있다"라는 부분. "자금이 부족하니 추가 투자유치를 해달라"고 하면서도 2년 간의 호황기때 받은 시리즈 투자 당시의 기업가치를 여전히 고집 부린다는 것. 당장 운영자금이 바닥난 상황이라 눈높이를 낮춰도 모자란데, 이런 고집으로 끝내 법정관리 절차를 밟는 기업도 나온다.
한 VC업계 운용역은 "일례로 한 기업은 매출이 잘 나오는 다른 기업과 합병을 준비하면서 자사 기업가치에 수천억원대의 밸류를 제시했는데, VC 입장에서는 투자하기엔 리스크가 있는 재무상태였다"라며 "뒤늦게 숫자를 낮추긴 했지만 결국 경영난에 빠졌다"라고 말했다.
VC심사역들의 만남요청을 회피하거나 주요 회사상황을 숨기는 일도 벌어진다.
VC업계 운용역은 "과거에는 이른바 '서비스'를 요청하려고 투자기업들이 이런 저런 만남을 요구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정반대 상황"이라며 "회사 재무상황이 어떤지, 매출은 얼마나 줄었는지 등을 체크하려고 자주 연락하면 전화도 잘 안받거나 회의 요청을 피하는 일도 늘어났다"라고 밝혔다.
VC로부터 투자받은 한 IT 관련기업 A사는 주요 거래처에 대한 정기적인 대금 지급이 밀릴 상황이어서 이를 긴급히 거래처들에게 통보했다. 거래대금이 밀리면 자재구입-부품수급-재고관리 등 모든 과정이 엉킬수도 있어 중요한 사항인데 이런 사항을 주주와 투자자들에게는 일절 알리지 않고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기도 했다.
CFO가 도망치듯 퇴사하는데 이를 뒤늦게 인지하는 일도 꽤 벌어지고 있다.
바이오 관련 B 기업은 신규 투자를 유치한 지 얼마 안 돼 CFO가 회사를 떠났다. 최근 플랫폼 관련 C 기업과, 상장에 어려움을 겪으며 일정 재조정에 나선 D 기업도 CFO들이 일신상의 이유로 퇴사를 했다. 한 VC업계 심사역은 "사후관리를 위해 CFO를 만나야 하는데, 건강 등의 사유로 퇴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난감하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런 리스크들이 불거지자 일부 VC 심사역들은 '자기방어'를 위해서 이런저런 '증거자료 확보'와 '문서작업'에 나서기도 한다. 즉 투자금을 낸 기관투자가들이 나중에 "투자한 기업이 왜 폐업했느냐" 등으로 따질 경우, 법적책임은 없음을 증빙하고자 사후관리에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문서를 준비하는 셈이다. 투자기업과 얼마나 자주 만났고, 투자기업에 어떤 요구를 했고 등을 세세히 기록에 남겨놓고 이를 소명하는 일이 이에 해당된다.
VC 심사역들은 새해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으로 보는 분위기다. 추가 자금을 모집하고 기존 기업에 다시 투자하기가 여의치 않기 때문.
일단 업계 예산 자체가 줄었다. 중소벤처기업부(중기부)에서 벤처기업에 투자하도록 VC 하우스들에게 나눠줄 모태펀드 예산도 2023년 4135억원으로 전년대비 20% 쪼그라들었다. 투자규모도 줄어드는 추세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올해 3분기 기준 벤처기업에 대한 신규 투자금액은 5조3000억원대로, VC업계가 한창 성장궤도에 올랐던 2020년(4조3000억원대) 당시의 규모보다 조금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또다른 VC업계 관계자는 "플랫폼이나 바이오 등 기업가치가 낮아진 곳에 주로 투자를 해온 운용사들은 사후관리에, 그렇지 않은 곳은 신규 펀드자금 모집에 집중할 한 해가 되지 않을까 한다"라며 "다만 전자든 후자든 모두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전망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