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속 기회' 강조하지만 적극 움직이기 부담
투자 않을 명분은 있지만 기업 미래가치엔 부정적
자산매각 등도 난항 예고…"기업 눈높이 낮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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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주요 대기업은 어느 때보다도 신년 포부를 지키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팬데믹 특수가 끝나며 실적 부진이 본격화했고 미래 청사진이 불투명해진 상황이라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기도 부담스럽다. 유동성의 흐름이 둔화하며 자산을 매각하거나 투자를 유치할 때 원하는 가치를 인정받기 어려워질 전망이다. 기업 입장에선 모두가 조심스러우니 일을 벌이지 않아도 될 명분이 있지만, 지금 멈춰 있다간 미래 성장 동력을 잃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삼성전자는 작년 매출 301조원, 영업이익 43조원의 잠정 실적을 기록했다고 지난 6일 밝혔다. 매출은 전년보다 8%가량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16% 줄었다. 글로벌 정세 불안으로 원자재 가격이 상승했고, 반도체와 스마트폰 등 수요는 감소했다. 국내외에서 추진 중인 반도체 공장 증설은 이어지겠지만 그 외 투자는 집행하기 어려울 것이란 시선이 있다.
삼성전자는 2021년 초 최윤호 당시 경영지원실장(사장)이 '3년 내 의미 있는 규모의 M&A’ 가능성을 언급했고, 이후에도 수뇌부가 여러차례 M&A 추진 의지를 드러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결정권자인 이재용 회장이나 정현호 사업지원TF장(부회장) 모두 대형 투자에는 보수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본업이 위태하니 시장에서도 대형 M&A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실무진 입장에서는 어차피 M&A를 못할 지금 상황이 다행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SK그룹은 2020년 이후 가장 활발한 투자 활동을 벌였는데 갈수록 재무 부담이 커지고 있다. 작년말 정기 인사 후 투자유치 성과를 알린 SK E&S 등 사례도 있지만 대부분 발걸음이 둔화하고 있다. 국내외 자산들의 매각 가능성이 거론되는데 원하는 값을 받을 수 있을지 미지수다. 계열사들은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의 계열 여신한도(각각 자본금의 15%, 50%)가 목에 차자 시중은행도 분주히 찾고 있다.
SK온은 작년 3월 포드사와 튀르키예에 배터리 공장을 짓기로 하는 양해각서(MOU)를 맺었으나 최근 이를 철회했다. 글로벌 사모펀드(PEF)와 SK온 투자유치 조건을 놓고 줄다리기 하는 사이 전기차 성장성 평가가 박해졌고 유럽에선 현지 기업 노스볼트에 대한 지원이 강화됐다. SK하이닉스도 반도체 수요 부진 영향을 크게 받을 전망이다. 잇따라 추진했던 반도체 M&A의 여파도 이어지고 있다.
한 M&A 자문사 관계자는 “뭔가 해야 한다는 압박에 실탄을 다 써버리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삼성전자는 어차피 하기 어려운 대형 M&A에 나서기보다 허리띠 졸라매기에 들어간 분위기”라며 “SK도 그룹 차원에서 숫자를 관리하라는 기조기 때문에 당분간 대형 투자에 나서기 조심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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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그룹도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다. LG에너지솔루션 물적분할로 시달렸던 LG화학이 상대적으로 분주할 뿐 다른 계열사들은 조심스럽다. 전장 부문에서 점차 성과가 나고 있다지만 ZKW 인수도 벌써 5년이 되어 간다. LG생활건강은 차석용 부회장 시대가 저물었고, LG유플러스는 분주한 움직임에 비해 손에 쥐는 것이 많지 않은 분위기다. 홍범식 사장 등 외부 영입 인사들의 존재감도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다.
롯데그룹은 작년말 롯데건설 유동성 문제로 곤욕을 치렀는데 계열사 지원 및 외부 자금 유치로 한숨 돌렸다. 이 여파ㅗ 일진머티리얼즈 M&A까지 차질을 빚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었는데, 재계 5위의 재무여력이나 평판위험 문제 등을 감안하면 잡음이 생기지 않게 마무리할 것이란 예상이 많다. 다만 수년간 이어질 국내외 대형 투자 프로젝트의 속도가 늦어질 가능성이 있다. 일진머티리얼즈, 한샘 등 주가 하락으로 그룹 내부에서도 M&A를 강하게 주장하기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한화그룹은 올해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마무리해야 하고, 태양광 사업 확장에도 공을 들여야 한다. 지난 수년간 지배구조를 개편하며 선제적으로 자금도 조달했지만 앞으로도 자금 소요가 많다. 해외 방위산업 수주 낭보를 이어가는 데도 금융 지원이 필요하다. 시장에서는 추가로 자산 매각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도 하는데, 이미 쓸만한 카드를 거의 소진했다는 시선도 있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올해 대기업들이 수행하는 대형 프로젝트들은 작년 이전부터 계획된 것인데 지금처럼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는 예정대로 진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고 말했다.
대기업들은 저마다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찾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대형 M&A나 투자에 적극 나서기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경영진에는 당장 큰 일을 벌이지 않아도 된다는 ‘면죄부’가 주어질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미래 가치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올해 대기업들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현금 확보다. 우량한 곳들은 고금리를 감수하고라도 회사채 시장이나 은행을 찾으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곳들은 자산 매각 카드도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올해는 자산 매각이나 투자자산 회수 역시 녹록지 않을 것이란 예상이 많다.
시장에 유동성의 온기가 그나마 남아 있었던 것은 작년 상반기까지다. 결과론적이지만 그 안에 상장(IPO)이나 지분 매각, 투자 유치 등을 하지 못해 실기(失期)한 사례가 많았다. 올해는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보고 미룬 거래들도 당분간 성사 가능성을 점치기 어렵다. 작년에 봤던 기업가치보다 한참 낮은 숫자를 보고 움직이자니 실무자도 경영진도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다. 시장금리는 앞으로도 더 오를 여지가 있고, 기업들이 눈높이를 낮추는 데는 또 몇 달이 걸릴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올해 대기업들이 내놓는 자산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작년 초에 거론됐던 금액이 있어서인지 아직 매각자의 기대치가 낮아지지 않는 분위기”라며 “당분간은 금리가 낮아지지 않을 것이고 기업보다 투자자가 우위에 있는 시기기 때문에 기업들도 점차 눈높이를 낮출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