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C·닥터자르트·3CE…아쉬운 글로벌 기업 'K뷰티' 투자 성적표
입력 2023.05.16 07:00
    한국 화장품 산업, 2010년대 본격적인 성장 구가
    유니레버·에스티로더·로레알 등 한국 브랜드 인수
    아시아 시장 확대 기대했지만, 인수 후 내리막길
    팬데믹·한-중 관계·달라진 기업문화 등 원인 꼽혀
    글로벌 기업들, 배당·유상감자 등 회수 행보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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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한국 화장품 산업은 2010년대 들어 본격적인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다. 깐깐한 품질 관리와 적극적인 브랜드 마케팅을 기반으로 대기업은 물론 신생 브랜드들의 실적과 이름값도 매년 올라갔다. 2017~2019년 사이 로레알, 에스티로더, 유니레버 등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 화장품 기업들을 잇따라 인수하며 한국 뷰티산업(K뷰티)의 위상도 절정으로 치달았다.

      글로벌 기업들은 한국 기업을 인수해 국내외 시장 개척 등 시너지 효과를 누렸지만, 현재까지 성적표는 썩 만족스럽지 않은 모습이다. K뷰티 산업이 절정일 때 비싼 값을 치르고 M&A를 진행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창업주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주인이 바뀌며 생동감이 사라지고,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핵심 시장인 중국에서의 존재감이 줄어든 것도 이유로 꼽힌다.

      2017년 M&A 시장에서 가장 화제가 된 거래는 유니레버의 카버코리아 인수다. 인수가는 3조원이 넘어 국내 화장품업계 M&A 사상 최대 규모로 남아 있다. 베인캐피탈-골드만삭스 컨소시엄, 창업주 이상록 회장도 1조원대 거부 반열에 올랐다. 유니레버는 카버코리아의 AHC 브랜드를 기반으로 북아시아 시장에서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카버코리아는 2014년 500억원에 불과하던 매출이 3년 뒤 10배 이상이 됐다. 유니레버에 인수된 이듬해 매출은 약 6600억원으로 최고조에 달했는데, 이후 하락세를 탔다. AHC 브랜드 가치는 여전했지만, 신규 브랜드들이 다양한 경로로 진입하며 경쟁 강도가 심해졌다. 2018년 200억원대이던 해외 매출은 작년 1000억원을 넘어섰으나, 국내 매출 감소분을 상쇄하긴 어려웠다.

      2020년 유니레버가 사업 조정의 일환으로 일부 지역에 특화된 소규모 브랜드를 매각할 계획이 있다고 밝히며 카버코리아 매각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했다. 작년엔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레버는 2018년 이후 순이익 규모를 넘어서는 배당 성향을 유지하며 자금을 회수하는 모습이다.

      프랑스 로레알그룹은 2018년 스타일난다를 인수했다. 첫 한국 브랜드 인수다. 스타일난다는 원래 서울 동대문 등 도매시장에서 보세제품을 떼와서 파는 의류사업이 본업이다. 로레알은 스타일난다의 색조 화장품 브랜드 ‘쓰리컨셉아이즈(3CE)’가 한국, 중국 등 젊은 세대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로레알의 고급 브랜드들이 중국에서 한국의 중저가 브랜드에 한창 밀리던 시기다.

      스타일난다의 이후 행보는 카버코리아와 비슷하다. 로레알이 인수한 다음해 최대 실적을 찍은 후 점차 내리막 길을 걷고 있다. 팬데믹 시기 색조 화장품 수요가 줄어든 영향이 크다. 로레알은 카버코리아에 기대 중국 시장 확대를 노렸지만 작년부터는 중국 사업을 줄이는 모습이다. 로레알은 2020년 카버코리아 유상감자를 통해 1326억원을 회수해갔다. 지분 100% 중 30%를 남기려다 모두 로레알에 넘긴 김소희 대표가 가장 큰 수혜자다.

    • 해브앤비는 2004년 이진욱 대표가 설립했고, 그해 말 닥터자르트(Dr.Jart+) 브랜드를 출시했다. 미국 시장에 집중했는데, 2011년엔 글로벌 H&B 세포라에 입점했다. 2012년 200억원대이던 매출은 2014년에도 335억원이었는데 2015년 800억원을 넘어서면서 급성장 궤도에 올랐다.

      해브앤비는 글로벌 뷰티 시장에서의 주목도가 높아졌는데, 에스티로더가 2015년 투자자로 나서 해브앤비 지분 약 33%를 확보했다. 2019년 에스티로더는 나머지 지분 약 67%까지 사들여 해브앤비 100% 주주가 됐다. 에스티로더의 첫 한국 브랜드 인수로 해브앤비 기업가치는 2조원으로 평가됐다. 피부과학을 앞세운 첨단 브랜드로 미국과 아시아 내 성장 속도가 빠르다는 점에 주목했다.

      해브앤비는 로레알에 인수된 해 최고 성적을 냈지만, 바로 다음해 실적이 급락했다. 2020년 선크림 자외선차단 지수 허위 표기 논란이 일었는데, 부실한 대응으로 일관해 소비자들의 원성을 듣기도 했다. 해브앤비의 직전사업연도 매출은 고점 대비 3분의 2수준으로 떨어졌다. 에스티로더는 로레알과 마찬가지로 2020년과 2022년에 유상감자를 진행해 3000억원가량을 회수해 갔다.

      한 M&A 업계 관계자는 "한-중 갈등이 심해지고 중국 내 브랜드들의 품질도 향상되면서 한국 화장품 브랜드들이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며 "최고 수준의 럭셔리 브랜드가 아니라면 중국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결과론적이지만 글로벌 기업들이 K뷰티 '브랜드' 자체에 집중한 전략이 성과를 내지 못하는 분위기다. 앞서 브랜드들은 시장에 '각인 효과'를 남겼다는 점만으로도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다양한 채널로 유망한 신규 브랜드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에 가져갈 수 있는 파이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창업주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주인이 바뀌며 역동성은 줄어들었다. 본사의 보수적인 마케팅 방식이 지적받기도 했다.

      카버코리아, 난다, 해브앤비 외의 국내 브랜드들도 수년 전 고점을 찍은 후 내리막을 겪는 사례가 많았다. 다만 K뷰티 산업 전체의 경쟁력은 여전한 만큼 코스맥스 등 화장품 연구·개발·생산(ODM) 업체나 화장품 원료, 용기 제조회사 등의 성장 잠재력은 남아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화장품 시장에 연동되면서도 개별 브랜드의 흥망성쇠와는 관계가 없는 ODM이나 후방 산업 기업들의 투자 매력도는 높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