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회계서야 드러난 채권 평가손실 900억…위법 소지 있을까
'무리한 운용' 지적 나와…OCIO 선정 위한 내부 실적 압박 거론
고위 경영자 의사결정 개입 어디까지?…금감원 조사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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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증권과 하나증권 사이의 채권 파킹ㆍ자전거래 의혹이 KB증권 내부통제 문제로 번지고 있다. 금융감독원 역시 해당 거래 과정에서 사내 내부통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는지 꼼꼼히 점검하고 있다. 관행과 편법, 감독의 공백 등 여러 이슈가 얽힌 가운데 최종 책임의 칼 끝이 어디로 향할 지 아직 예단하긴 어려운 상황이란 지적이다.
논란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다. ▲3개월짜리 단기 특정금전신탁을 1년ㆍ3년만기 채권에 투자한 것이 옳은지 ▲채권에 투자하는 신탁상품을 시가가 아닌, 장부가로 평가해 반영하는 것이 옳은지 ▲결국 회사가 고객 대신 900억여원의 평가손을 떠안은 데 대해 내부통제 시스템에 문제는 없었는지다.
증권가 일각에서는 KB증권이 최근 외부위탁운용관리자(OCIO) 사업 확장에 집중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신탁 관련 사업의 성과가 중요했던만큼, 최고경영자 급에서 사실상 묵인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금감원은 현재 KBㆍ하나증권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채권 자전거래와 파킹거래에 대한 검사를 진행 중이다.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면 조사 대상을 업계 전반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기업ㆍ법인 고객들에게 단기 채권 투자 상품을 팔면서 장기 채권(여신전문금융채)에 투자해 온 '만기 불일치' 부분과, 채권 평가손을 숨기기 위해 타 증권사 신탁 계정을 활용해 자사 계좌에 있는 장기채를 장부가격(매입가격)으로 다시 사들이는 '자전거래' 혐의 두 가지를 중점적으로 보겠다는 입장이다.
KB증권은 '장단기 미스매칭 운용은 불법이 아니다'라고 해명한다. 금융회사는 신탁 상품과 관련, 선량한 관리자로서 고객 자산 운용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다만 대형 금융사일수록 신탁 자산의 규모는 일정수준 유지되는 경향이 있고, 일반적으로 장기 채권이 단기 채권보다 높은 수익률을 주는 만큼 '만기 미스매칭' 운용은 관행적인 행동이었을 거란 분석이 많다.
이번 특정금전신탁 상품이 문제가 된 건 지난해 11월 채권 시장이 경색되며 신탁에 돈을 맡긴 법인 고객들의 환매 요청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시중금리 급등으로 인해 장기채 가격이 급락했고, 환매를 위한 채권 매각조차 여의치 않았다.
이는 하나증권을 통한 자전거래가 발생한 배경이기도 하다. 고객의 환매 요청에 대응할 수 없게 되자, KB증권은 하나증권에 맡긴 자사 자금을 활용해 고객 신탁 계좌로 보유하던 채권을 장부가(원가)로 사들였다. 이를 두고 KB증권은 자전거래가 아니라 '고객에게 유동성을 공급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한 금융 전문 변호사는 "이 같은 거래는 처음으로 법적 문제가 제기됐던 2010년대 중반에도 불법과 합법 경계선상에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며 "금융사 입장에선 현실적인 필요가 있어서 존재했지만, 일반적인 시장 거래가 아니기 때문에 위법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안다"고 분석했다.
KB증권은 이렇게 취득한 채권을 '장부가'로 반영해두고 있다가 금융당국이 지적이 있은 뒤에야 시가평가를 했다. 이 과정에서 KB증권은 900억원의 평가 손실을 장부에 반영했다.
신탁 계정 채권과 관련, 이를 장부가로 평가해야 하는지 시가로 평가해야 하는지는 이전까지 명시적으로 정해진 바가 없었다. 때문에 금융사들은 지난 10년간 관행적으로 장부가 평가를 해왔다.
금융당국도 이를 사실상 묵인해왔지만, 지난해 채권시장 경색 이후 이슈가 발생하자 '시가평가를 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놨다. 금융당국의 감독 공백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란 지적이 나온다.
마지막 문제는 '장단기 미스매칭 운용'과 '타사 신탁 계정을 통한 자전거래', 그리고 '장부가로 평가하던 채권의 시가평가로 인한 손실'을 회사의 내부통제 시스템을 통해 인지하고 있었느냐다.
업계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의 배경으로 KB증권의 무리한 운용 전략을 지적한다. 결국 법인 고객에게 높은 수익률을 돌려주기 위해 편법의 경계를 넘나든 게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OCIO 사업 전략을 배경으로 꼽는 시각이 적지 않다. KB증권은 최근 수년간 OCIO 시장 공략에 공을 들여왔다. 주요 연기금 OCIO 주관사 선정 기준 중 하나가 랩어카운트 등 신탁 계정 운용 규모와 실적이다. 이번 사태 역시 법인 고객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무리하게 장부가 환매를 진행해주다 벌어진 일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회사의 수익을 위해 내부통제 시스템이 변칙적인 거래를 용인했다고 해석할 수 있게 된다. KB증권에서 WM(자산관리)과 S&T(세일즈앤트레이딩)을 총괄하는 이는 박정림 사장이다. 박 사장은 취임 직후부터 랩ㆍ신탁과 OCIO 운용 역량 확보를 강조해 오기도 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KB증권이 눈독을 들이던 고용노동부가 OCIO 주관사로 내세운 기준 중 하나가 채권형 랩 잔고였는데,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 KB증권 내부에서 잔고(신탁자금)를 최대한 많이 남기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소문이 시장에 돌았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불법이 아니다'라는 사실만 강조한 KB증권의 모호한 해명이 악수(惡手)가 됐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KB증권의 해명 이후, 금감원이 '업계 관행'에 대해 전수조사 의지를 내비쳤기 때문이다.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채권 시장은 채권 브로커라는 소수의 플레이어들끼리 학연과 지연으로 얽혀 폐쇄적으로 거래하는 곳이다. 하나하나 문제 삼으려면 끝도 없다"며 "사실상 장외시장이라서 시장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데다, 유동성 공급(고객 환매)을 최우선으로 두고 거래를 진행했을텐데 일이 커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