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 '투자 도피처' 된 딥테크…'혹한기만 버티자'
입력 2023.06.19 07:00
    챗GPT가 이끈 AI테마주 열풍에…투자 시장도 딥테크 '주목'
    VC도 딥테크 투자 확대…바이오ㆍ커머스 줄이고 딥테크 늘리고
    "올해 혹한기 버텨야…인건비만 들고 정리 쉬운 회사가 좋아"
    • (그래픽=윤수민 기자)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일단 버티기 좋다. 설사 못 버티고 망하더라도, 들어가는 비용이 인건비 정도이기 때문에 사업 정리가 쉽다는 것이 최고 장점이다." (한 벤처캐피탈 투자심사역)

      생성형 AI(인공지능)이 가져온 '딥테크'(첨단기술) 테마 호황이 국내 벤처캐피탈(VC) 업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만 최근 국내 VC업계에서 딥테크는 '투자 도피처' 역할이 더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관투자자(LP)들로부터 모은 투자금을 일단 집행해야 하는데, 최근의 투자 혹한기에서 ▲그나마 성장성이 주목받고 있고 ▲사업구조상 생존에 유리한 기업이 주로 딥테크인 까닭이다. 그간 대규모 투자금을 가져갔던 바이오 벤처기업들이 LP들의 눈밖에 난 것도 딥테크 투자 확대에 힘을 싣고 있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국내 VC들은 딥테크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비중을 포트폴리오 내 상당 수준으로 늘리고 있다. VC마다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50% 이상이 될 거란 전언이다. 딥테크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하이테크 분야로, AIㆍ블록체인ㆍ사물인터넷(IoT)ㆍ자율 주행ㆍ양자암호 등 첨단 기술이 포함된다. 

      중소기업벤처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벤처투자 금액은 전년 말 대비 약 12%(9162억원) 감소한 6조7640억원으로 파악됐다. 투자 규모는 특히 3분기부터 고물가ㆍ고금리의 영향으로 크게 감소했다. 3분기 벤처기업 투자액은 전년 동기 대비 38.6%, 4분기엔 43.9%씩 급감했다. 

      투자 침체기 속에서도 딥테크에 포함되는 정보통신기술(ICT) 서비스 업종은 투자 비중이 늘어났다. ICT 서비스 업종에는 가장 많은 2조3518억원(34.8%)이 투자됐으며, 전체 투자금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3.2%p 늘었다. 반면 같은 기간 바이오 업종 투자는 5.5%p 줄었다.  

      이런 추이는 올해도 이어지고 있다. 초기투자가 집중된 올해 1월, 딥테크 벤처기업들은 시드 투자부터 시리즈D 단계까지 약 357억원 이상의 투자를 유치, 업종별 투자 규모 기준으로 2위를 차지했다. 이후에도 블록체인ㆍAI 등 딥테크 분야 기업들은 매달 최소 3건에서 최대 9건까지 투자를 유치한 것으로 파악된다. 

      한 국내 VC 투자심사역은 "2021년까진 VC들이 최소 2배에서 최대 5배씩 투자금을 회수했었는데, 작년 6월부터 10%의 수익률(IRR)을 보장하겠다고 해도 LP들이 쉽게 투자하질 않고 있다"며 "그나마도 딥테크 투자를 언급하면서 펀드를 결성해야 투자금이 모이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 (그래픽=윤수민 기자)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VC들이 딥테크 투자를 확대하는 배경에는 해당 업종에 대한 긍정적 전망보다는, 당장 투자할 곳이 마땅찮은 상황에서 리스크를 회피하려는 심리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보통 딥테크 기업들은 인건비가 핵심 비용이고, 장비 및 데이터는 임차 혹은 구매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비교적 저(低)비용으로 투자 혹한기를 버틸 수 있는 사업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선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딥테크 기업들은 첨단 기술을 운용할 수 있는 인력에 쓰는 인건비가 8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2020년부터 투자가 집중돼 온 플랫폼ㆍ커머스 기업들은 마케팅 비용 지출이, 바이오 기업은 임상 개발 등 오퍼레이션(운용) 비용 지출이 절반 이상이다.

      플랫폼 회사 관계자는 "플랫폼은 영업이익이 나지 않는 대신, MAU(월간활성이용자수)ㆍ매출 등 '숫자'가 전월 대비 조금만 떨어져도 도태되는 비즈니스라는 인식이 있다"며 "마케팅비를 계속 태우면서 성장해야 한다는 공식이 있어, 운전자금이 크게 든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초기 투자를 전담하는 한 AC(액셀러레이터) 중 최근 업계에서 회자되는 한 업체의 경우 투자 기업들의 5년 이상 생존률이 약 95%로 집계됐는데, 여기에는 딥테크 위주의 투자가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이 회사의 포트폴리오는 산업기술과 데이터ㆍAI가 전체의 50% 이상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헬스케어는 20%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분석된다.

      결국 투자업계는 소수의 개발자 인력만 채용하면 큰 지출 없이 몇 년 동안 버틸 수 있는 딥테크를 '투자 도피처'로 꼽고 있다. 수익화에 실패하거나 기업이 망해도, 사업 정리 과정에서 리스크가 적다는 것 역시 장점으로 인식된다. 

      다른 VC 관계자는 "딥테크 기업은 망한다고 해도 사람(인력)만 자르면 된다. 코어(창업주)만 유지하면 다시 살릴 수 있다"며 "딥테크 전용 기술특례상장 제도가 도입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투자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VC 바이오 심사역은 "최근 VC들이 시리즈C, D 등 후기단에는 억지로 들어가지 않는 분위기지만, 딥테크엔 예외라는 분위기"라며 "이 때문에 바이오 기업들도 'AI 진단기기', '의료용 소프트웨어' 등을 내세워 딥테크로 분류받으려고 애쓰고 있다"고 밝혔다.